‘PP로프’ 저렴한 반면 쉽게 삭고 열에 약해 “좀더 촘촘한 안전 기준 필요”
달비계 위에 올라앉은 고층 건물 작업자. 달비계는 PP 로프로 연결돼 있다. 연합뉴스
2018년 9월 7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의 한 병원 건물 외벽 유리창 청소를 하던 용역업체 직원이 작업 중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올해에도 사고는 이어졌다. 7월 27일 울산 중구의 한 아파트 현장에선 도색 작업 중인 작업자가 추락해 사망했다. 같은 달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아파트단지와 부산 중구 보수동 4층 건물에서도 유사 사고가 발생했다.
계속되는 고층 건물 작업자 사망으로 8월 14일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외벽 도색 작업 노동자 추락사고,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란 주제로 세미나를 주최했다. 참석한 전문가들은 외벽 도색 작업을 비롯 고층 건물 청소작업 등 일명 ‘고소 로프 작업’에 대한 법 제정과 현장 계도 및 안전교육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 세미나의 결론과 달리 고소 로프 작업 전문가 입장에선 고층 작업 추락사의 핵심은 로프였다. 고소 로프 안전용품 전문가 최 아무개 씨(35)는 “핵심은 로프다.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의 고층 건물 청소 장비와 한국의 고층 건물 청소 장비는 비전문가가 보더라도 쉽게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은 보통 PP 로프(Polypropylene Rope)를 쓴다. 반면 선진국에선 ‘페츨(Petzl)’ 등 산업안전용품 전문회사에서 나오는 로프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PP 로프. 사진=한국조경수협회
문제는 고층 청소업체가 아세톤이나 에탄올, 벤젠 등 용매제를 세척에 자주 사용한다는 점이다. 용매제가 지방이나 왁스 등 유기화합물인 지류 제거에 탁월하기 때문이다. 고층 작업자는 시너도 자주 사용한다. 고층 빌딩 도색 작업 때 시너는 필수다. 그런데 용매제나 시너는 PP 로프를 삭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게다가 PP 로프를 포함한 합성섬유 로프는 열에 약하다. 햇빛에 노출되면 인장 강도가 약해진다. 고층 작업자는 대부분 맑은 날 작업을 하니 합성섬유 로프는 제 힘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될 수밖에 없다.
햇빛에 취약한 데도 PP 로프는 그냥 덩그러니 로프 자체로만 유통된다. 이에 반해 산업안전용품 전문회사 상품은 훼손 방지용 비닐과 박스 포장까지 돼 제공된다. 로프의 핵심을 감싸는 외피까지 적용돼 외부 충격이나 변형에서 PP 로프보다 강하다. 로프의 인장강도와 신장률, 로프 사용법 등의 매뉴얼까지 동봉된다. 로프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방법 등 유의사항 역시 상세히 적혀 있다. 로프 사용 일지도 들어있어 장비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돕는다.
상황이 이런데 업계에서 PP 로프를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다. 고소 로프 작업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14㎜ PP 로프 200m는 약 8만 원에 거래된다. 14㎜ PP 로프 200m는 약 18.8㎏이다. 1㎏당 4300원인 셈이다. 이에 비해 프랑스 산업안전용품 전문회사 페츨에서 나오는 로프는 1㎏에 약 8만 원 수준이다. 약 20배 가까이 비싸다.
이에 대해 산업계는 “작업자 스스로가 안전 장비를 구입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아무런 규제 없이 오롯이 작업자의 선택에 넘겨 버리면 가격 문제에 있어서 작업자의 선택이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다. 업계에서 14㎜ PP 로프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14㎜ PP 로프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기준에 부합하는 가장 저렴한 수단인 까닭이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지침 가운데 작업용 로프 및 안전대 걸이용 로프 안전조치사항에는 “달비계를 지지하는 모든 로프는 최소 22.9KN(킬로 뉴턴)의 강도를 가진 인조섬유여야 한다. 허용하중을 초과해선 안 된다”고 나온다. 달비계는 고층 작업용 의자를 말한다. 22.9KN은 대략 2340㎏을 버틸 수 있는 강도를 뜻한다. 14㎜ PP 로프는 약 2400㎏까지 버틴다. 결국 고층 작업자 추락사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지침상 조건이 촘촘하지 못한 탓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고용노동부에는 로프 관련 규정이 아예 구비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고소 로프 작업에 있어 로프 관련 최소한의 기준이 나와야 안전한 고소 로프 작업이 가능하다. 하지만 업계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세미나 발제자로 나선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소속 한 교수는 고소 로프 작업 관련 달비계 규정에서 문제 원인을 찾았다. 전국플랜트건설노조 관계자는 보조 안전 로프 착용을 문제 삼았다. 고공 로프 작업 현장에 대한 특별안전점검 실시와 안전 관리자 배치안만 나왔을 뿐이었다.
고용노동부는 형식적인 태도만 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세미나에서 “현행 법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첫 술에 완벽할 순 없지만 도장작업 ‘추락재해 예방 안전정보’ 제공 및 지도점검 강화, 필수 안전수칙 준수를 위한 권역별 특별안전 교육 등을 실시해 외벽 도색 작업 노동자의 추락사고를 사전 예방토록 하겠다”고 했다. 이어 “건설업 예산이 올해 321억 원에서 내년 544억 원으로 늘어난다. 작업안전성 확보를 위한 재정지원 확대를 검토하는 한편 중장기적으로는 작업자들이 좀 더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개발하고 지원하는 등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고소 로프 안전용품 전문가 최 씨는 “고용노동부든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든 하루 빨리 고소 로프 작업 관련한 세세한 지침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작업자가 산업 현장에서 최소한의 안전 장비를 의무적으로 쓴다. 거기서부터 추락사가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