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이긴 유일한 인간’ 이세돌, 바둑판 떠나 새 길 찾는다

한국기원과 대립각 은퇴 앞당겨…“바둑과 무관한 일 할 것” 정치입문 등 추측 무성

[일요신문] 이세돌 9단이 11월 19일 전문기사직을 사퇴하면서 24년 현역 기사 생활을 마감했다. 이세돌은 1983년 3월 2일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95년 7월 2일 조한승과 함께 입단했다. 당시 12세 4개월 입단 기록은 조훈현, 이창호에 이은 최연소 3위 기록이었다. 2000년 12월 천원전과 배달왕전에서 연속 우승하며 타이틀 사냥을 시작해 2002년 15회 후지쓰배를 시작으로 세계대회 18회 우승과 국내대회 32회 우승을 기록했다. 입단 후 첫 공식대국(제7회 동양증권배 예선, 최창원 6단)을 7월 26일 두었고, 마지막 공식대국(KBS바둑왕전 본선16강, 박영훈9단)은 올해 7월 30일에 있었다. 통산 1904전 1324승 3무 577패를 기록했고, 공식 상금은 98억 원에 달한다. 

세계대회 18회 우승과 국내대회 32회 우승을 기록한 이세돌이 24년의 현역 기사 생활을 마감했다.

승단문제, 바둑리그 불참, 기보저작권, 바둑판 사인 등 여러 사안에서 참지 못하는 기질 덕분에 바둑계 내부에선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2009년 기사총회에서 징계를 논의하자 돌연 휴직을 선언하며 이슈가 되었다. 프로기사회와 이세돌 간 마찰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6개월 만에 복직해선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우승을 포함해 24연승으로 질주했다. 2014년은 구리 9단과 벌인 세기의 이벤트 10번기에서 6승 2패로 승리하며 다시 바둑계 중심에 섰다. 2016년엔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에서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1승 4패로 패했지만, 이세돌이 거둔 1승은 현재까지 인류의 유일한 승리이며 마지막 승리일 가능성이 크다. 

이세돌은 형 이상훈 9단과 함께 19일 오전 한국기원을 직접 방문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미 예고했던 은퇴지만, 바둑계 인사와 팬들에게 다가오는 충격은 적지 않았다. 프로기사 박정상 9단도 “동료를 넘어서 개인적으로 팬이었다. 남다른 기질과 기발한 발상으로 그 누구보다 재미있는 바둑을 보여줬다. 또한 승부사의 자세와 바둑에 대한 고뇌를 함께 공유하던 사랑하는 선배였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다른 프로기사들도 “앞으로 이세돌의 바둑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라는 점에서 대부분 의견을 같이했다. 이세돌은 이미 2~3년 전부터 입버릇처럼 ‘세계대회 우승에 도전 못 하게 되면 은퇴하겠다’라 말해왔었다. “기질 상 AI로 인해 바둑 수에 개성이 사라지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는 진단도 있다. 

1995년 7월 2일 이세돌(왼쪽)은 12세 4개월의 나이에 조한승과 함께 입단했다.

이세돌이 승부사로 은퇴를 말하기 시작한 건 2017년 9월 삼성화재배 본선에서 패한 후였다. 알파고 효과로 반짝 상승했던 성적이 주춤해졌던 시절이다. 삼성화재배는 자신의 절정기를 함께했던 가장 애착하는 대회. 그러나 2015년 준결승에서 커제 9단에게 0-2으로 패하고, 2016년도 다시 커제를 만나 1-2로 패퇴했다. 사석에서 “내가 마음먹으면 커제는 아직 상대가 안 된다”라고 호언장담하던 때였기에 자존심이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 다음 해 ‘이번엔 뭔가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나섰는데 막상 본선 16강에서 퉈자시 9단에게 막힌 것이다. 지난해 5월 신진서 9단과 벌인 GS칼텍스배 결승 5번기에서 2-3으로 패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음을 내려놨다고 추측된다. 인공지능 수법을 흡수한 젊은 기사에게 자신의 실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절감한 결승대결이었다. 이후 올해 3월 커제와 ‘3·1운동 100주년 기념 대국’서 완패하고 바로 공식 은퇴를 예고했다. 

‘올해 말 내년 초’로 예정했던 은퇴 일정이 앞당겨진 건 프로기사회와 불협화음, 한국기원과 갈등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2016년 5월 프로기사회 탈퇴로 시작된 불화는 지난 7월 한국기원 정관 변경으로 절정에 달했다. ‘한국기원 주최 기전엔 기사회 소속 기사만 참가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사실상 기사회 손을 들어준 결론이었다. 기원 입장에선 다시 기사회로 돌아오라는 제스처가 포함되었지만, 이세돌 측 생각은 달랐다.
 

2000년 12월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우승한 이세돌. 이때부터 타이틀 사냥을 시작했다.

일요신문과 전화인터뷰에서 이세돌의 형 이상훈은 “사직서를 내고 함께 기원을 나오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휴직을 고려했지만, 한국기원이 정관을 통해 대회 참가자체를 막은 상태라 이후 복직이 의미가 없었다. 세돌이는 올해 푹 쉬고, 내년부터 바둑과 관련 없는 일을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기사회 적립금을 둘러싼 소송은 은퇴와 관계없다. 한국기원은 기사회 요청으로 이세돌이 기사회를 탈퇴한 후 지난 3년간 상금공제액(국내 기전 5%, 해외 기전 3%)을 보관하고 있다. 반환요청금은 약 3200만 원 정도다. 현재 진행 중인 이 소송은 기사회를 친목단체로 규정한 이세돌과 기사회 사이 자존심 대결에 가깝다.  

2002년 제15회 후지쓰배 우승트로피를 든 이세돌.

앞으로 구체적인 행보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다양한 제안을 들어온다고 한다. 이세돌은 예전부터 인터넷바둑사이트를 만들거나, 블록체인 관련 투자에 관여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었다. 국내에선 후배나 지인들이 요청하면 ‘이세돌 바둑도장’을 차리도록 이름을 빌려줬지만, 실제 도장운영은 관여하지 않았다. 형 이상훈조차 현재 바둑도장을 접은 상태다. 중국 베이징에 설립한 이세돌 바둑학교는 지금도 동업자가 운영 중이다. 입단을 위한 바둑도장이 아니라 입문자 교육을 주로 하는데 등록 인원은 꽤 있다고 알려졌다. 한국기원과 인연을 끊은 이상 바둑기사로 중국이나 일본에 진출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세돌 측은 “바둑을 두고 싶으면 인터넷으로 두면 된다”는 입장이지만, 평생 마주했던 바둑판을 쉽게 물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올 수도 있다. 마침 국회에서 바둑계를 대표하는 조훈현 의원(자유한국당)은 내년 총선에 불출마선언을 한 상태고,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바둑계 인사 공천을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시점이다. 이세돌의 정치성향은 이미 대외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에 대해 최근 이세돌은 “아직까진 정치권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2014년 5월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에서 열린 이세돌과 구리의 ‘고원의 결투’ 10번기 5국. 당시 이세돌은 고산지대의 생소함을 극복하고 2-2의 상황에서 반격에 성공했다.

현재 한국기원은 기자회견이나 은퇴기 등 별도 행사를 준비하진 않고 있다. 올해 바둑대상 예정 수상자 명단에도 없다. 한국기원과 소송 등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서 뭔가 준비할 명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기원 측에선 “무엇보다 이세돌과 이상훈 형제가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며 난색을 보인다.  
 

2016년 3월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에서 이세돌은 1승 4패로 패했지만, 이세돌이 거둔 1승은 현재까지 인류의 유일한 승리이며 마지막 승리일 가능성이 크다.

이세돌과 10번기에서 뜨겁게 경쟁했던 구리 9단은 자신의 웨이보에 “지금은 꼭 안아주고 싶을 뿐, 할 말은 수천수만 가지인데 이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까”는 말을 시작으로 “고맙다! 알파고라는 강적을 만나 ‘신의 한 수’로 인류의 지혜와 보물을 지켜줬다. 너는 내게 언제나 추구할 목표였다. 함께 바둑에 길을 걸을 수 있어 감사했다.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다. 언젠가 내게 ‘정상에서 내려가도 후회는 없다. 그래도 난 이 생에 한번 멋지게 살아봤잖아’라고 말했지. 이 한 잔은 너의 화려했던 과거, 다음 한 잔은 너의 희망찬 내일을 위해 건배한다. 이 세상에 다시없는 독보적인 이세돌로 거듭나길 기원한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알파고와 함께 신의 한 수를 남긴 세기의 승부사 이세돌은 끝내 바둑판에서 돌을 쓸어담았다. 불합리와 틀에 박힌 상식을 싫어했던 개성 넘치는 그의 성향이 바둑판 너머 세상 2막에선 어떤 족적을 남길까.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