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도피 중이던 정한근 씨가 6월 22일 국내에 송환됐다. 정 씨는 1997년 11월 시베리아 가스전 개발회사인 동아시아가스(EAGC)를 세우고 회사 돈 3270만 달러(당시 약 320억 원 상당)를 스위스 비밀계좌로 빼돌린 혐의로 1998년 6월 서울중앙지검에서 한 차례 조사를 받은 뒤 해외로 도주했다. 정 씨의 해외도피 생활은 검찰의 5개국 공조로 21년 만에 마감됐다. 4개의 위장이름과 위장결혼 등 해외도피부터 체포과정까지 그야말로 한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한보그룹 정태수 넷째 아들 정한근 검찰 압송. 해외 도피 21년 만에 체포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6월 22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박은숙 기자
하지만 더 극적인 사건이 터졌다. 정 씨가 검찰 조사과정에서 자신과 함께 해외도피 중이던 정 전 회장이 사망했다고 밝힌 것. 정 전 회장은 한보사태의 몸통이자 검찰의 수사선상 최상위에 있었다. 정 전 회장의 체납액만 2225억 원대에 이른다. 검찰은 최근까지 키르기스스탄에서 정 전 회장이 살아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정 씨 체포로 그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정 씨는 아버지 정 전 회장이 2015년쯤부터 건강이 나빠졌으며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가 지난해 12월 사망했다고 진술했다. 정 씨는 정 전 회장의 임종을 지켜봤다며 정 전 회장의 사망과 장례를 입증할 증거물도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정 씨 진술을 의심하면서도 진위 확인에 나섰다. 검찰은 지난 24일 외교부 외교행랑편으로 정 씨의 여행가방 등을 인계받았다. 여행가방 등에는 정 씨 주장대로 정 전 회장을 화장한 유골함과 관청 발급 사망증명서, 정 전 회장의 키르기스스탄 국적 위조여권 등이 담겼다.
사망증명서에는 정 전 회장의 위조여권상 이름과 정 전 회장이 지난해 12월 1일자로 에콰도르 소재 병원에서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 기재됐다. 검찰은 정 씨의 진술과 사망증명서의 내용 등을 토대로 정 전 회장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잠정 결론을 냈다. 물론 검찰은 사망증명서 위조여부나 발급 근거자료 등 추가 확인을 할 방침이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과거 청문회·재판 과정 중 침대와 휠체어, 마스크 착용으로 모습을 드러내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연합뉴스
정 전 회장은 불법대출과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이때 드러난 한보 정태수 리스트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리스트에는 고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을 비롯해 권노갑과 문정수 등 정치인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 대부분 검찰 조사를 받고 기소됐다. 당시 열린 한보 청문회에선 정 전 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계열사 사장을 머슴이라고 부르는 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은 5년 5개월 동안 복역하다가 2002년 10월 고혈압과 협심증 등 병보석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이보다 앞서 1991년 정 전 회장은 수서 지구 개발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에게 개발이권 명목으로 로비를 벌인 이른바 수서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뇌물의 상징이 된 ‘사과상자’와 재벌과 정치인들의 ‘휠체어 코스프레’도 정 전 회장이 원조다.
이후 2007년 자신의 며느리가 운영하던 강릉영동대학의 교비 72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1심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정 전 회장은 2심 재판 도중 대장암 재발 등 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한 뒤 그대로 해외로 도피했다. 그의 첫 도피처는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였다. 그 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에콰도르 등을 떠돌았다.
소재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던 대검찰청 국제협력단(단장 손영배 부장검사)은 최근 국제 공조를 통해 정 전 회장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 결과 정 전 회장은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다 키르기스스탄 위조여권으로 2017년 7월 에콰도르로 이동해 아들 정 씨와 유전 관련 사업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에콰도르에서는 중국인으로 위장 생활을 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과거 모습. 연합뉴스.
검찰의 추적과 함께 정 전 회장의 도피도 만만치 않았다. 법무부가 정 전 회장이 카자흐스탄으로 도피한 사실을 파악한 뒤 카자흐스탄 당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하자 정 전 회장은 키르기스스탄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던 키르기스스탄 역시 정 전 회장 덕분(?)에 현재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된 상태다. 이러자 정 전 회장은 정 씨가 거주한 에콰도르로 옮겨갔다. 에콰도르 역시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나라다. 검찰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에콰도르와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에 나섰다. 검찰은 이와 동시에 에콰도르 내무부에 정 씨에 대한 강제추방을 요청했다. 에콰도르 당국은 정 씨의 출국 사실을 미리 알려주기로 우리 측에 약속했고 결국 이를 지켰다.
하지만 정 전 회장의 생사는 여전히 확보되지 못했다. 정 전 회장의 사망 사실이 최종 확인될 경우 정 전 회장의 횡령 혐의 등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게 되고 2225억 원대에 이르는 체납액 역시 환수할 수 없게 된다. 검찰은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와 범죄수익환수부(부장검사 박철우), 대검 산하 해외불법재산환수 합동조사단(단장 이원석 부장검사)뿐 아니라 국세청, 에콰도르 당국과 협력해 정 씨의 국외 재산 환수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2001년 5월 국세청이 정 씨를 수백억대의 재산국외도피 및 조세포탈 혐의로 추가 고발한 건과 해외 도피 과정에 대한 수사를 통해 추가 혐의에 대해서도 계속 파악해 나갈 방침이다. 검찰은 정 씨 외에도 정 전 회장의 아들들의 수백억 원에 이르는 미납 추징금 확보를 위해서라도 한보 일가의 은닉 재산을 찾는 데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정경유착’의 불명예 속에 타국을 떠돌던 정 전 회장의 마지막 모습은 여행가방에 담긴 사망증명서와 유골함이 전부였다. 영욕과도 같은 정 전 회장과 한보사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서동철 기자 ilyo100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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