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들의 ‘바짓바람’ 사라졌다
▲ LPGA 한국 선수들의 경우 부모의 간섭이 많이 사라졌다. 오히려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미셸 위의 부모가 가장 적극적으로 따라다닌다. 사진은 미셸위와 부친 위병욱 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박세리가 LPGA 무대에서 승승장구하며 한국인들에게 자부심을 던져 줄 무렵 라이벌인 김미현은 밴을 몰고 미 전역을 다닌다는 고생담이 언론에 보도됐었다. 박세리에게 비쳐진 스포트라이트는 눈물 젖은 빵을 먹는다는 김미현의 상투적인 고행기로 옮겨졌다. 김미현이 실제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호텔이 아닌 싸구려 모텔 여기저기를 옮겨 다닌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박세리가 워낙 도도하고 취재와 접근이 까다로워지자 한 방송사에서 새로운 스타를 만들고 대항마를 키워야겠다는 의도적인 목표로 ‘김미현의 밴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혹독한 고생과 훈훈한 미담은 항상 언론의 취재 대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 건너와 고생하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성공했다는 스토리는 부풀려지기 일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의 나라에서의 활동이 고생스럽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지방 출신이 서울에 올라가도 고생하는 법이다.
김미현, 한희원, 장정 등 한국 LPGA의 1세대격인 고참 선수들은 대회 때마다 밴으로 이동했다. 요즘 국내 연예인들이 애용하는 차종이다. 밴에는 온갖 살림을 할 수 있는 도구가 다 완비돼 있었다. 미국에서의 가장 큰 고충인 한국 음식이 대부분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밴으로 이동한 가장 큰 이유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은 아니다. 한희원이 돈이 없어서 밴을 타고 이동했다면 난센스다. 한희원의 부친 한영관 씨(현 리틀리그야구연맹 회장)는 체육계에서 알아주는 재력가다.
밴 이동은 대회 장소에 접근이 쉽고 편리해서였다. 밴을 구입하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게다가 밴에 집같이 편안한 시설을 구비할 경우 차량 구입비만 10만 달러 가까이 소요된다. 중고차라면 몰라도 돈이 없어서 밴으로 이동했다는 기사는 논리에 맞지 않는다.
대회 장소의 이동거리가 짧을 때는 밴이 훨씬 편하고 수월하다.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도착해서 찾는 시간이 많이 소요돼 짜증나는 일이 반복된다. 베테랑 박세리에게 나이 들어 투어 활동에 힘든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동이다. 대회 끝나고 짐 싸는 게 가장 싫다. 누군가 짐 싸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며 고충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장거리 때는 밴의 이동이 선수의 기량 발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다. 그래서 아버지들이 밴을 몰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선수는 비행기편으로 가게 된다. LPGA 한국 아버지들의 희생이 컸다. LPGA 1세대는 아버지의 역할이 두드러진 ‘바지 1세대’의 다름 아니다.
1세대 아버지들은 사생활뿐 아니라 골프 기술에 관해서도 깊이 관여했다. 심지어 경기 도중 플레이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소리를 질러 미국 내 언론에 이슈가 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골프를 했던 부친의 권유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기술적인 간섭이 심했던 것 역시 1세대였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밴의 이동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다. 1세대 선수들의 밴 이동은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도 있었다. 미국에 대한 정보 부재도 빼놓을 수 없다. 자연히 비행기보다는 밴의 이동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박세리를 제외한 1세대 선수들은 영어 습득이 나중에 이어졌다. 현 LPGA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은 영어 소통이 가능한 상태에서 미국에 건너왔다. 선수와 부모들도 정보과잉 시대에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밴은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비행기 이동에 호텔 숙식이다. 쾌적한 환경에서 골프에 전념하는 시대다.
밴의 시대가 자취를 감춘 데는 금융위기로 빚어진 LPGA 대회 축소도 결정적이다. 김미현, 한희원 등이 밴으로 이동할 때는 한 시즌 LPGA 대회가 평균 32개 대회씩 열렸다.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 2008년에는 34개 대회를 치렀다. 거의 1주일마다 대회가 비슷한 지역에서 열려 밴의 이동이 편했다. 그러나 요즘은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대회가 20개 미만이다. 한 번 대회를 치르면 몇 주 지나서야 열릴 정도다. 선수들은 한국이나 일본으로 갔다가 미국으로 오기 때문에 밴이 필요하지 않다.
현 세대의 선수들은 미국의 작은 지방도시에서도 스마트폰으로 한국 식당을 찾는다.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 참가한 한 LPGA 선수는 경기 전 모 기자가 취재를 겸한 저녁 제안에 곧바로 스마트폰으로 한국 식당을 찾는 기민함을 과시했다. 세월과 환경이 이렇게 다른 시대를 만들었다.
▲ 김송희. |
오히려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미셸 위(위성미)의 부모가 가장 극성으로 따라 다닌다. 연습 날부터 부친과 모친이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심지어 프로암 대회 때는 부친이 미셸 위의 가방을 메며 캐디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선수들의 부모는 예전 1세대 때의 잡음 탓인지 매우 조심스럽다. 박세리, 김미현 등을 취재한 1세대 기자들도 선수보다 아버지 취재가 더 중요했고, 그들이야말로 가장 밀접한 취재원이었다. 심할 경우 ‘호형호제’를 하면서 기자와 취재원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선수의 부모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한편 훨씬 나아진 환경에서 김미현과 같은 악착스러운 후배들이 뒤를 잇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지적이 따른다. 김미현은 신체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LPGA 무대에서 무려 8승을 거뒀다. ‘울트라 땅콩’으로 통했던 장정도 메이저대회 브리티시 여자 오픈을 포함해 3승을 올린 베테랑이다. LPGA 1세대는 박세리가 군계일학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었다. 현재는 이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골프기자들은 최나연과 신지애를 라이벌로 보질 않는다. 선수는 무수히 배출되고 있으나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는 스타플레이어는 오히려 1세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승, 2승 선수는 꽤 있어도 박세리처럼 LPGA를 지배하는 슈퍼스타는 배출되지 않고 있다. 외화내빈이다. 대만 청야니의 독주체제가 계속되면서 한국 선수들이 위축되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문상열 스포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