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땅에서 일본 복싱경기가 왜?

일본 빅이벤트 활활 태울 불쏘시개 역할 그런거야?

[일요신문] 한국 땅에서 열리는 일본의 프로복싱 세계타이틀매치가 과연 성사될까? 극도의 흥행 침체에, 중앙기구(한국권투위원회·KBC)마저 내분에 휩싸인 한국 프로복싱에 이색적인 빅이벤트가 추진되고 있다. 일본 최고의 흥행복서가, 장소만 한국 땅을 빌릴 뿐 모든 것을 일본이 주최하는 세계타이틀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한국 프로복싱에 자극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선수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반기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반일감정을 섞어 ‘한국복싱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냐? 무슨 식민지 프로복싱경기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바로 WBA 밴텀급 챔피언 가메다 고키(龜田興毅·26)와 동급 15위에 올라있는 한국의 무명복서 손정오(32·한남체육관)의 10월 제주도 타이틀매치 얘기다.

2006년 WBA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에 오른 장남 고키. 로이터/뉴시스

한남체육관의 김한상 관장(지인진, 최요삼, 라크바 심(몽골) 등 다수의 세계챔피언을 가르친 바 있다)은 지난 8월 6일 급히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들 삼형제를 세계챔프로 만든 가메다 시로씨(48)가 장남 고키의 세계타이틀매치와 관련해 의논할 일이 있다고 연락이 왔던 것이다.

시로 씨의 제안은 놀라웠다.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타이틀매치를 갖는 것. 그런데 그 내용이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장소만 한국 땅이지, 자신들이 프로모션을 직접 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로복싱에서는 경기가 열리는 나라에서 흥행을 책임진다. 해당국가 소속의 프로모터가 방송사를 잡고, 관중을 동원하고, 그 수익금으로 대전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키는 일본에서 대전료가 최대 2억 엔(약 23억 원)인 인기복서로 침체에 빠진 한국 프로복싱 시장에서는 그 개런티의 절반을 맞추는 것도 불가능한 형편이다. 시로 씨도 이러한 한국 사정을 잘 알기에 장소만 한국이지 방송사, 스폰서, 그리고 300명이 넘는 관중까지 자신들이 직접 프로모팅을 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10월 중순까지 방어전을 치러야 하니 한국에서 경기장, 호텔 등을 알아봐달라고만 주문했다.

김 관장이 귀국해 알아보니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문제가 다수 있었다. 한국에서 외국인이 직접 흥행 이벤트를 하려면 사업자등록증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권투위원회(KBC)가 승인하지 않을 태세였다. 후자는 어차피 JBC(일본권투위원회)가 주관하는 일본경기인 까닭에 여차하면 강행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전자는 일정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알아보니 특별자치행정구역인 제주도에서는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이를 시로 씨에게 통보하니 8월 안으로 계약을 맺자는 답이 왔다.

왜 시로 씨는 굳이 한국 땅에서 방어전을 치르려고 하는 것일까? 김한상 관장은 “일단 상황이 그렇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시로 씨는 오는 연말 삼형제가 동시에 세계타이틀매치를 치르는 빅이벤트를 이미 기획해 놓았다. 그 전에 맏형인 고키의 타이틀매치를 한 번 치르려니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손쉬운 상대인 손정오를 택한 것이고, 또 그냥 일본에서 치르자니 이슈거리가 없어 흥행이 잘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돼 한국행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가메다 가문이 2013년 12월 삼형제 동시 세계타이틀매치를 이벤트를 앞두고 한국에서 흥행대박의 씨앗을 던지려 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튀는 행동은 일본 언론이 ‘싸가지 없는 퍼포먼스’라고 부를 정도로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한국땅에서 반일감정 및 혐한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행동이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가메다 가문은 삼형제가 모두 세계 챔피언에 올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왼쪽부터 둘째 다이키, 첫째 고키, 셋째 도모키, 부친 시로 씨. 로이터/뉴시스

하지만 누구도 챔피언 측이 자신들의 돈을 들여 한국땅에서 도전자를 지명해 경기를 하겠다는데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한국 프로복싱은 존재감을 상실한 지 오래다. 가장 역사가 깊은 WBA의 타이틀매치는 무려 1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것이다(양대기구인 WBC까지 포함하면 9년). KBC의 월별 랭킹표를 보면 선수부족으로 10위까지인 랭킹이 채워지지 않은 게 1/3이 넘는다. 선수들도 복싱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야식배달, 막노동, 술집웨이터 등을 부업으로 한다. 그러면서도 챔프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2체급 한국챔피언에 이어 PABA(범아시아복싱협회) 챔피언이 된 손정오도 2008년 은퇴했다가 챔피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링으로 돌아온 32세의 노장이다. 지금도 피 섞인 오줌을 싸고, 체육관 링 위에서 잠을 자며 세계타이틀매치만을 기다리고 있다. 손정오는 “무조건 흥분된다. 달나라에 가서라도 타이틀매치를 하고 싶을 정도다. 그만큼 간절하다”라고 답했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 김한상 관장은 이번 ‘한국땅 일본의 세계타이틀매치’에 대해서 “한국 복싱은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일본 쪽에서 쉬운 상대를 골랐다고 하는데 선수와 코치 입장에서는 열심히 운동해서 그들이 깔아놓은 잔칫상에서 승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라고 말했다.

김 관장은 통산 20승(6KO)4패2무의 손정오에게 세계타이틀매치 경험이 많은 김광수 관장(현대체육관)을 트레이너로 붙여 철저히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