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 사업 재도전하며 ‘특혜’ 운운 목청 높여…계열사 몸집 불리기도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이 최근 공격 경영의 모습을 다시 보이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수년 전부터 계획해왔던 사업들을 실행하는 것일 뿐”이라며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유통업계에서는 그동안 롯데와 신세계가 각축을 벌이던 업계에 현대백화점까지 가세하면서 진정한 유통 빅3의 치열한 전쟁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했다.
정지선 회장의 질주가 뚝 멈춰버린 것은 지난해 7월 10일 서울시내 신규 면세점 경쟁에서 탈락하면서다. 신성장동력이 절실한 현대백화점 입장에서 면세점 사업은 꼭 필요했지만 경쟁사들에 밀려 고배를 마시면서 위축됐다.
면세점 사업 진출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실시했던 서울시내 면세점 특허 심사에는 아예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같은 달에 우선협상대상자 지위임에도 동부익스프레스 인수를 포기하면서 현대백화점과 정 회장은 급격히 몸을 낮췄다.
지난 3월 중순, 현대백화점은 4개월여의 침묵을 깼다. 정부가 서울시내 면세점에 대해 신규로 추가 허용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이자 현대백화점은 오히려 4개 이상으로 더 많이 늘려야 하며, 현행 ‘허가제’인 면세사업을 아예 ‘신고제’로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백화점은 또 정부가 지난해 서울시내 면세사업자에서 탈락한 롯데 월드타워점과 SK네트웍스 워커힐점을 구제해준다면 “짜놓은 각본이라는 ‘도루묵 특혜’ 내지 ‘돌려막기식 특혜’에 불과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기업이 이토록 강력한 주장을 펼치는 경우는 드물다. 대기업 고위 인사는 “정부 방침에 대해 정치권이 아닌 기업이 ‘특혜’라는 표현까지 쓴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며 “직접 관련이 있는 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정부를 향한 주장이라기보다 사업을 둘러싸고 서로 갈등하고 있는 업체들을 향한 발언”이라며 “면세점 사업과 관련한 갈등과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유통업계 일부에서는 현대백화점이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기가 여의치 않자 면세점 사업에 재도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유통 빅3로 불리면서도 현대백화점은 대형마트와 편의점 사업을 하지 않아 유통 부문에서 새로운 사업을 찾기 힘들다”며 “월드타워점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는 곳 중 하나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을 기반으로 면세점 사업이 승산 있다고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무역센터점 일부 층을 리모델링해 면세점을 유치한다 해도 매출에 큰 차이는 없다”며 신성장동력 때문이라는 해석을 부인했다.
신세계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점도 정지선 회장에게 위기감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세계는 지난 2월 26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증축 오픈하면서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지난 3월 초 부산 센텀시티점 신축관을 연 데다 앞으로 신세계백화점 대구점·김해점 오픈, 국내 최대 교외형 복합쇼핑몰로 꼽히는 하남 유니온스퀘어 오픈 등을 준비하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계획하고 추진해왔던 ‘6대 프로젝트’가 올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일요신문DB.
신세계의 이 같은 공격적인 투자가 현재 백화점업계 2위인 현대백화점과 정지선 회장을 자극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신세계 관계자는 “백화점 부문은 올 하반기쯤 현대백화점을 제치고 업계 2위 기반을 다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유통업계 다른 관계자는 “신세계가 잇달아 백화점을 증축하고 개점하면서 현대백화점과 업계 2위 싸움을 벌이고 있다”며 “마땅한 수가 없는 현대백화점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현대리바트·한섬 등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사들이 공격 경영에 나서는 것도 경쟁사에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로 보인다. B2B(기업과 기업 간 거래) 사업에 주력해왔던 현대리바트는 지난해부터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사업을 확장해 나갔으며 스마트가구 부문에도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패션계열사인 한섬 역시 최근 연매출 1조 원을 목표로 백화점 위주였던 유통망을 면세점·가두점 등으로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신규 여성복 브랜드 론칭, 물류센터 가동 등도 계획돼 있다. 현대백화점의 공격적인 경영은 물론 정지선 회장의 지시에서 비롯됐다. 재계 관계자는 “유통 경쟁사들이 갖고 있는 대형마트·편의점 사업을 하지 않는 현대백화점으로서는 제조업 계열사들의 성장이 정체돼 있는 유통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현대백화점이 올해 사상 최대 규모가 될 전망인 인수·합병(M&A) 시장에 다시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10년대 초 리바트, 한섬 등을 인수하며 M&A 시장의 강자로 부상한 현대백화점은 2014년 한라비스테온공조(현 한온시스템), 지난해 동부익스프레스를 인수하는 데 잇달아 실패하면서 그 기세가 주춤했다.
특히 한라비스테온공조와 동부익스프레스는 인수 직전까지 갔다가 포기한 것이어서 충격이 더 컸다. 만일 현대백화점이 면세점 사업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면 물류업체가 절실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어 또 다른 물류업체를 물색할 가능성도 있다. 유통업체들이 정체된 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지난 수개월간 몸을 낮췄던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의 이번 2차 공격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