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8개월 만에 드라마 복귀하는 이은을 만났다
‘안투라지’로 복귀하면서부터 이은은 이 유리막을 볼 줄 모른다. 촬영장 구석구석에 설치된 유리방문을 열어젖힌다. 여기는 오늘 무슨 일이 있는지, 저쪽은 잘 굴러가는지 계속 묻고 다닌다. 촬영 장소가 크고 준비된 소품이 많으면 이은은 프로듀서에게 다가가 묻는다. “이거 제작비 엄청 들겠어요. 돈 넘치면 어떡해요?” 이은의 질문이 제작비를 줄여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쓱 웃는다.
이은이 돌아왔다. 11월 4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tvN ‘안투라지’로 드라마에 복귀했다. 12일 이은은 4부에서 ‘이은 분’으로 출연하며 복귀를 알렸다. 4년 8개월만의 일이다. 그 사이 이은은 ‘어른 아이’가 돼 있었다. 아이 같은 눈웃음을 하며 어른 같은 말로 인터뷰 시간을 채웠다.
사진=이종현 기자
이은은 2012년 3월 8일 종영된 <채널A> 드라마 ‘총각네 야채가게’를 끝으로 연예계를 버렸다. 이은은 “너무 힘들어서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어요. 이 판을 떠나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10년 넘게 배우 생활을 이어오며 유지했던 봉태규와의 연인 관계가 끝나자 그녀는 버티기 힘들다는 말조차 하고 않고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어떠한 기억을 지우려면 무언가를 다시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은은 “기억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기억을 지우면 내 20대는 다 사라지게 되잖아요. 그게 너무 슬펐어요. 가장 예뻐야 할 20대를 버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기억이고 뭐고 간에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좀 필요했어요. 모든 걸 내려놓고 무작정 아무 일이나 하기 시작했죠”라고 말했다. 2012년 이은은 서른이었지만 할 줄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수능이 끝난 고 3 때 피자헛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캐스팅 된 뒤 처음 나온 사회였다. 이은은 연예계 밖에선 이제 갓 스물이 된 서른 살 여자였다.
“정말 손에 닿는 일이라면 다 했어요. 컴퓨터도 할 줄 모르죠. 연기 빼고 한 게 뭐 있었나요?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냥 손에 잡히는 일이라고는 다 했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그렇게 날마다 일만 했어요. 이것저것 다!” 이은이 말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일하던 도중 이은은 예전에 함께 작업했던 동료 배우들을 우연히 몇 번 마주쳤다. 촬영장에서는 ‘배우’라는 같은 방에서 그렇게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었는데 방 밖으로 나온 이은에게 그들은 눈인사만 하거나 그냥 지나쳤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인데 애써 외면하고 지나치는 게 좀 슬펐어요”라고 그는 그때 감정을 떠올리더니 이내 누그러트렸다. “그래도 공효진 언니랑 조은지 언니는 날 보러 자주 왔어요.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며 응원해주면 마음이 금세 따뜻해졌어요.” 이은은 금방 웃음을 되찾았다.
사회 경험이 좀 쌓인 뒤 이은은 그제야 ‘회사’라는 곳에 취직할 수 있었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광고를 제작하는 현장으로 간 그는 그때부터 배우와 모델을 대접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은은 배우였을 때 보이지 않던 세트 뒤 사람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배우였을 땐 이 많은 사람들이 안 보였어요. 오로지 카메라, 그리고 내 앵글. 그 밖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몰랐죠. 그런데 막 그때부터 보이는 거예요. ‘이 분은 날 돋보이게 하려 이런 일을 하셨었고 또 저 분은 나 때문에 이런 고생도 하셨겠구나.’ 그런게 보이니까 모든 게 궁금해졌어요. 다들 어떤 일을 해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지를요!”
그렇게 모든 게 보이기 시작하며 이은은 ‘현재’를 사랑할 줄 알게 됐다. 이은은 “배우 생활 할 때는 늘 ‘다음에 뭐 찍고 이 다음에 어떤 거 해야지’ 생각하며 미래만 이야기했어요. 사랑이 종착역에 다다랐을 땐 ‘과거를 어떻게 지우지?’하며 과거에만 집착했고요. 그런데 이제 그런 건 별로 안 중요해졌어요. 내가 살며 만나는 사람과 주변이 더 소중하고 현재를 가장 사랑해요. 전 이제 지금의 제가 제일 좋아요”라고 말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이은은 이제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는데 그걸 모르고 살았던 거예요. 과거, 그리고 미래를 놓으니까 그제서야 현재가 보이고 내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느껴지더라고요. 과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걸 버린 게 너무 비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아무런 고민 없이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졌어요.” 그가 말했다.
이제 이은은 들어오는 대본 하나 하나가 소중하다. 역할 때문이 아니다. 대본 한 개, 오디션 한 번의 기회를 얻으려 뛰어다니는 주변 모든 사람들이 고맙다. “이제 곧 중국도 진출할 거 같아요. 시트콤을 찾아 보기 힘들어졌지만 꼭 다시 해보고 싶어요”라고 답하는 동시에 이은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 뭐든 중요한 건 딱 하나 같아요. 우리는 현재를 사랑하기보다 과거랑 미래에 너무 집착하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현재에 집중하라’며 한 명 한 명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순 없어요. 그냥 지금 ‘우리의 현재, 그 자체를 사랑하자’고 말하는 작품에서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을 연기해보는 것, 그게 지금 가장 하고 싶어요. 제가 시청자께 드릴 수 선물은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연기로 보여주는 것 뿐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이종현 기자
인터뷰는 11일 오후 12시 30분부터 2시 30분까지 신사동 3 Story 한 켠에서 이어졌다. 초반 20분 정도 사진 먼저 찍고 사진기자가 떠난 뒤 인터뷰가 진행됐다. 작업을 끝내고 먼저 일어나는 사진작가에게 이은은 작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저 때문에 점심식사 못 하셨죠? 죄송해요. 이 동네 제일 맛난 김밥 사뒀어요. 가시는 길에 드세요”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