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언론인 | ||
작년에도 1백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청원군 꽃동네의 현도사회복지대학에 기증했다고 전한다. 공수래 공수거의 한 전범(典範)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으나 이제는 그 돈을 뜻있게 쓰는 재미로 살겠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부럽다. 아닌게 아니라 자타 공인의 의미 있는 재미로 그 이상 덮을 게 없을 것 같다. 평양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혼자 월남한 이래 감당한 적수공권의 고난이라든가 버스회사를 차리기까지 들인 공력이 신산했기 때문에도 보람이 아주 클 터이다.
우리 사회에는 기왕에도 모진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독지가들의 기부 행위가 적지 않았다. 일찍 홀로 된 안노인네들이 특히 많았다. 떡장사 밥장사로 어렵사리 일군 재산을 몽땅 들고 대학을 찾아 가난한 학생을 도와달라 일렀다. 못배운 한을 이웃사랑으로 격상시킨 셈이다. 하나같이 안먹고 안쓰고 모은 정재인 까닭에 마침내 꽃피운 미덕이 그때마다 한층 돋보였다.
번 돈의 일부를 복지시설에 내놓는 관습은 서양사회에 더 현저하지만, 한국 할머니들의 이와 같은 희사는 돈의 축적 과정이 매양 슬퍼 차라리 애처로웠다. 속내를 알고 보면 8?5나 6?5 같은 격동기 인생유전과 무관하지 않다. 때문에 줄곧 변방으로 밀려났던 삶을 이기고 도달한 여유의 산물이 아름다웠거늘, 그런 세대들이 차츰 사라져간다.
노년에 들수록 누구나 재산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우아하게 살기를 꿈꾸지는 못할망정 남이나 자식의 도움없이 최소한의 생계나마 유지하도록 미리미리 노후대책을 서두른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옛말도 이제는 헛소리고, ‘영감님 주머니 돈은 내 돈이요, 아들 주머니 돈은 사돈네 돈’ 경향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해던가.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노인들을 대상으로 생의 마지막을 무엇에 의지하겠느냐고 물은 여론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미겳탛독은 50%가 종교였다. 그에 비해 일본은 반 이상이 재산이었다. 신앙과 종교는 4%에 불과했다. 일본인의 대부분이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탓이겠지만 우리네 경우는 어떨지 궁금하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문제인 것이 재산인 것만은 확실하다. 재산이 많을수록 유산을 둘러싼 가족간 분란이 덩달아 많아졌다. 하다못해 방송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추석 명절을 쇠러 고향을 찾은 동기들끼리 벌이는 갈등 반목을 안타까워하는 모양으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얘깃거리다.
‘쾌척’이라는 표현이 가볍게 들릴 정도로 큰 돈을 사회에 바친 강태원옹은 하지만 그 점에서도 퍽 유달라 보인다.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아파트 한 채씩 사줬으면 됐지 더 이상 주면 그들의 미래를 망친다고 말했다.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인데 왜 자식한테 주느냐는 의지도 당당히 피력하고 나섰다. 고집스런 선의의 아버지상을 느끼게 만든다. 여간해서 하기 힘든 일을 선선히 해낸 결단이 그래서 대범하고 놀랍다.
변화가 죽 끓듯 하는 형편에, 가다가는 재미 삼아 옛날 자장면을 먹듯 옛날식 문물을 새삼스럽게 되돌려 쓰기도 하는 세상에, ‘옛날식 부모’만은 낡음의 원조로 몰아붙이기 쉽다. 과연 그런가. 가령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수없이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보자.
“요즘 사대부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오래 전부터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사다. 네가 한번 생각해 보아라. 부엌에 들어간들 무엇이 그리 손해가 되겠는가? 다만 잠깐 연기를 쏘일 뿐이다. 그런데 연기 좀 쏘이고 시어머니의 환심을 얻으면 효부가 되고, 법도 있는 집안도 만드니 효도하고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주운 밤 한 톨을 빼앗긴 아이가 ‘마치 여러 개의 송곳으로 뼛속을 찔린 듯 우는’ 걸 보고 탄식하기도 했다. “아 세상에 이 애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 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게 된 사람들도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다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을 것이다.”
1백70년 전 한 아버지 편지의 어디에 고루한 인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경우는 다르되 이번 미담을 노경의 사신(捨身)과도 연관시켜 생각하려는 의도가 여기 있다. 이광훈/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