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해방 후 한때 좌익문학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간부로 참여하기도 했던 좌익계열의 문인들이 줄줄이 월북할 때도 끝까지 서울에 남아 있다가 6·25 직후 누군가를 만나러 나간다며 집을 나선 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조선문학가동맹이 해체된 뒤 오랫동안 칩거하던 정지용이 다시 얼굴을 드러낸 것은 1949년 11월4일, 이른바 국민보도연맹에서였다. 국민보도연맹은 한때 좌익활동을 했거나 협력했다가 전향한 인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관제단체였다.
보도(保導)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뜻이었다. 정부는 49년 11월 한 달 동안을 좌익세력 자수전향기간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으며 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문인들이 전향하지 않을 경우 저서를 판금조치하겠다는 서울시경 국장명의의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보도연맹에 나타난 정지용은 연맹에 가입하는 감상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소위 야반도주하여 삼팔선을 넘었다는 시인 정지용이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러한 중상과 모략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내가 지금 추궁하고 싶지 않다. 나는 한 사람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이다. 나는 23년이라는 세월을 교육에 바쳐왔다. 그래서 나는 집을 옮기는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던 바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권유가 있어 오늘 온 것이다.”
정지용이 6·25가 일어나기까지 8개월 동안 보도연맹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6·25 직후 누구를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그동안 소식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6·25전란 중에 월북해서 거기서 활동하다가 타계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아버지 정지용의 행방을 찾는다며 집을 나섰다가 역시 행방불명되었던 셋째아들이 50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달라며 북에서 서울로 연락을 해왔다는 점이다.
2000년 11월, 남북이산가족 상봉 명단교환 과정에서 밝혀진 사연이다. 서울에 있던 가족들은 그동안 정지용이 북녘땅에 살아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느닷없이 북녘땅에 살고 있다는 셋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다며 서울로 연락을 해왔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얼마전 <부산일보>의 김기진 기자가 펴낸 <국민보도연맹>이란 저서는 6·25 직후 경남지방 일대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6·25가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군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전제 아래 수만 명의 보도연맹원을 학살했던 사실을 각종 자료를 통해 고발한 역작이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보도연맹원들에게 어느 날 몇 시까지 어디로 모이게 한 뒤 이들을 집단학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그들 보도연맹원들이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흔히 전란 중에 희생된 억울한 원혼을 두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들먹이며 쉽게 체념하곤 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간 자리에는 으레 억울한 죽음이 남게 마련이라는 식의 논리였다.
시인 정지용의 행방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아무 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보도연맹원이었던 그가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집결장소로 갔다가 거기서 희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당나라 때의 시인 이하(李賀)는 억울한 죽음 앞에서 ‘피도 한스러워 천년을 두고 푸르리라’고 노래했다. 역사의 행간에 묻혀버린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어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은 비단 유가족들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후손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역사의 수레바퀴’ 운운하는 수사(修辭)가 결코 그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면죄부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