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그래서 ‘값이 얼마만큼 올랐다’는 소식이 반갑지만은 않다. 내가 이 공간으로부터 버림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애정을 바친 것들은 정이 들게 마련이어서 재건축 조합동의서에 서명해달라고 사람이 올 때마다 나는 불편하다. 저 나무들은 어떡하나, 하고. 그래서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끝까지 안 할 것이다. 그래도 재건축을 하게 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필요하다면 리모델링이나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삶에서 경제논리가 앞서게 되면 너무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
요즘 우리 동네는 단풍이 화려하다. 풍성한 단풍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나는 깊은 숨을 쉰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지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하는 시인의 마음이 돌연하게 찾아든다. 마치 불난 것처럼 환한 단풍은 왜 저리 강렬한가, 왜 저리 슬픈가, 왜 저리 아까운가? 아름다운 것은 강렬하고 슬프고 아깝다. 짧기 때문이다.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모세는 시편에서 그 짧음을 이렇게 기도했다.
‘주의 목전에서는 천년이 어제 같은데 우리의 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풀처럼 짧다’고. 그런데 풀처럼 짧은 그 생을 채우는 것도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모세의 기도에 공명하면서 나는 물음을 던진다. 풀처럼 짧은 생이, 천년도 어제 같은 영원한 신을 만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고.
지난주에는 청담 스님 탄신 기념대법회가 있었다. 거기서 김수환 추기경은 청담 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추억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중놈이 하느님을 찾으니 중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하느님이라고 하건, 불성이라고 하건 거리낄 게 없는 스님이, 언어 이전의 세계 속에서 소소영영한 주인공을 찾았던 스님이 추기경을 만나 그렇게 말씀하신 모양이다. 자유인의 모습이다.
풀처럼 짧은 인생이 어떻게 영원한 하느님을, 영원한 불성을 찾을 수 있을까? 거꾸로 물어보면 답을 구할 수 있을까? 영원하고 무한한 신이 무엇 때문에 유한하고 찰나적인 이 세상에 와서 33년을 살다 가셨을까, 하고. 부족한 게 없는 완전한 신이 무엇을 바라 이 땅에 오셨을까?
성경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수고와 슬픔뿐인 이 땅에 왔다고. 사랑하기 위해 고통과 눈물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고. 사랑하지 않으면 희생인 것이 사랑하면 충만이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저런 일도 있구나, 하고 담담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사랑하면 슬픔이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권태롭고 심심한 일이 사랑하면 행복한 일이 된다. 이 땅에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가 짊어진 수고와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은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피워낸 꽃이었다. 영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남을 ‘나’로 느끼는 그 능력, 사랑의 능력 속에 숨어 있었다. 다른 생명을 깊이 느낌으로써 그 만큼 내가 깊어지는 신비 속에서 사랑과 영원의 관계를 짐작해 본다.사랑은 영원의 꽃이다. 저리 짧은 단풍은, 단풍을 보고 끌려가는 내 마음은 영원이 피워낸 꽃인 것이다. 천양희 시인의 ‘저 모습’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루를 살다죽은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천 일을 물 속에서 보낸다 스무 번도 넘게 허물을 벗는다…”그러니 그 하루는 무상해서 절망스런 하루가 아니라 평생이 준비한 하루, 초원의 빛이고 꽃의 영광인 하루다. 끝내 허무하고 무상하다 해도 그래서 더 아름다운 그런 날, 그 날들을 충분히 느껴야 한다. 그 날은 바로 영원이 준비하고 피워낸 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