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카 명함’으로 수억 날름날름
사채업자 이 아무개 씨는 성 씨가 잘나가는 무역회사 기업 전무이사인 줄로 알고 마카오와 말레시아 카지노에서 VIP급 대접에 도박자금 차용을 아끼지 않다가 일주일 만에 3억 원을 날렸다. 사채업자조차 완벽히 속인 대범하고도 치밀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봤다.
신용불량자에다 범죄전력까지 있는 성 씨가 영등포에 있는 15억 원짜리 아파트를 가진 재력가로 둔갑하는 데는 불과 한 달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는 교도소 수감 중 재력이 있는 해외 이주자의 경우 사채업자들이 돈을 쉽게 빌려준다는 점을 노려 지인들과 범죄를 계획했다.
성 씨는 교도소 수감 중에 만난 이들에게 본인이 도박에 소질이 있으며 범죄를 도울 경우 중국인 명의 계좌를 만들어 수익이 날 때마다 공평하게 실시간으로 입금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해 ‘해외원정도박단’을 구성했다.
출소 후 성 씨는 명의를 위조하기 위해 ‘재력이 있는 해외 이주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강남의 한 복덕방을 찾았다. 이때부터 재력가 행세는 시작됐다. 그는 강남 부근의 한 고가 아파트를 매입할 것처럼 속여 시가 15억 원 이상의 아파트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소개받은 아파트 등기부 여러 장을 꼼꼼히 확인해 이들 중 근저당이 잡혀 있지 않은 소유자를 물색해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빼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도 그리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지인이었던 구청직원에게 도박으로 얻은 수익을 배분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주민번호 뒷자리를 파악했다. 그렇게 물망에 오른 대상자들 각자의 개인정보 및 신상을 파악한 성 씨는 무역회사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유 아무개 임원으로 자신을 포장하기로 결정, 중국에 있는 여권·신분증 위조꾼에게 의뢰해 가짜 신분증을 손쉽게 만들었다. 또 중국인 명의의 대포통장 여러 개를 만들어 수익을 배분할 공모자들과 나눠가졌다.
성 씨는 유 씨가 해외출입이 잦은 무역회사에 근무한다는 점을 감안해 위조된 새 여권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무도장으로 각국의 출입국 인장을 만들어 여권 여기저기에 찍어 자신을 해외에 자주 출입하는 재력가로 완벽하게 둔갑시켰다.
한 달간의 치밀한 준비를 끝낸 성 씨는 마침내 4월 27일 일당 다섯 명과 목적지인 마카오로 떠났다. 성 씨의 모든 계획은 치밀한 준비과정 덕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우선 VIP 카드부터 발급받았다. 두 곳 모두에서 별 의심 없이 VIP 카드가 즉시 제공됐고, 그는 카지노 내 VIP실을 마음껏 드나들었다. 피의자이자 피해자인 한인 사채업자 이 아무개 씨(46)를 만난 것도 바로 이 VIP실이었다. 주요 고객을 타깃으로 사채업을 해오던 이 씨에게 성 씨가 다가가 먼저 ‘○○기업 유 아무개 전무이사’라고 새겨져 있는 명함을 들이밀었다. 그는 “환전해 온 금액이 넉넉하지 않다”며 1억 8000만 원 상당을 차용했다. 이 씨는 성 씨가 아닌 유 씨의 개인정보와 재산관계를 검색해 본 뒤 채무관계가 없다는 점과 상당한 재력가라는 점을 확인해 별 의심 없이 해당 금액을 빌려줬다.
성 씨는 처음 차용한 금액을 바카라에 모두 탕진했다. 빌린 돈을 도박으로 탕진하고 다시 두 차례에 걸쳐 차용을 요구하자 사채업자 이 씨는 서서히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함에 적힌 회사 번호로 전화를 걸어 유 씨의 신분에 대해 캐물었다. 회사 측에서는 “유 전무이사가 회사에 다니는 것이 맞고 현재는 해외 출장 중이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개인 신상이라 알려드릴 수 없다”고 답해 운 좋게 의심을 피해갔다.
이 씨는 전화통화 후 성 씨를 더욱 믿고 도박자금으로 사용할 것을 알면서도 10%의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성 씨에게 이후 세 차례나 도박자금을 차용해 주는 등 일주일 만에 모두 3억 원을 빌려줬다. 또 도박에 쓸 칩을 전달하는 등 성 씨의 옆에서 도박 행위를 적극 돕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성 씨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고 계획한 대로 도박으로 거액의 돈만 딴다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355회에 걸쳐 바카라 등 카지노 도박을 했다. 그러나 도박의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단 한 푼의 이익도 얻지 못한 채 빌린 돈을 모두 탕진했다. 성 씨와 범죄를 공모한 일당들은 수익 배분은커녕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게 됐다. 일당 중 몇 명은 급기야 현지에서 노트북을 훔쳐 알선업체에 넘기는 수법으로 수익을 얻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관계자는 “사채업자를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성 씨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다보니 이번 사건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만도 9명에 이른다”며 “성 씨에게 속은 사채업자 역시 도박자금을 알선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사기를 당했다고 보긴 어렵고 되레 공모죄가 성립된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