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외국인선수를 영입하지 않고 국내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꾸리고 있는 포항은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즌 초반, 만족할 만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황 감독은 이런 칭찬과 관심이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뭘까?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황선홍 감독은 올시즌 자신의 이름에 꼬리표처럼 붙는 ‘황선대원군’이란 별명이 불편하기만 하다. 외국인선수는 감독 입장에서 필요 이상의 존재이고, 어쩔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국내 선수들로만 팀을 꾸렸지만, 정말 중요한 상황이 만들어질 경우 자신도 외국인선수를 수급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날 ‘쇄국축구’ 주의자로 몰아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어쩔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외국인선수를 영입하지 못한 것이지, 영입 안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명문팀은 모든 선수들이 오고 싶어 하는 팀이 명문팀이다. 거기엔 훈련여건, 재정 모든 게 다 포함된다. 더욱이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해 좋은 축구를 펼치는 것도 명문팀의 조건이다. 난 구단의 재정이 허락된다면 곧장 외국인선수를 영입할 것이다.”
지난해 FA컵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포항스틸러스 홈구장에서 철조망 세리머니까지 펼쳤던 황 감독은 올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과 정규리그를 위해 코치들을 브라질로 보내 일찌감치 외국인선수 영입에 나서기도 했었다. 그러다 구단으로부터 재정난으로 인해 외국인 선수 들이기가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한 달 반 넘게 속앓이를 했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당시에 충격이 컸었다. 포항에서 2년 동안 3위만 했기 때문에 올해는 정규리그 우승에 도전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는 터라 외국인 선수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구단의 결정에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싶었다. 그동안 선수단만 신경 썼지, 구단의 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선 잘 몰랐다. 구단 입장에서도 얼마나 안타까웠겠나. 내가 구단을 이해해야 했다.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외국인선수 영입을 고집했다간 우리 선수들을 시장에 내놓고 팔아야 하는 상황이라 고민을 거듭하다가 소속 선수로만 선수단을 운영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 “FC서울의 데얀이 부럽지만…”
황 감독은 외국인 선수가 없는 동안 포항의 어린 선수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동안 출전 기회가 없었던 선수들에게 과감한 기회를 부여했다. 지난 3월 13일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분요드코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2차전에는 빡빡한 스케줄로 인해 2군 카드를 꺼내들고선 2-2무승부를 이끌었다. 이날 경기를 뛴 14명의 선수들 중 9명이 포항 유스팀 출신이었다.
“일단 기용해봐야 한다. 패할 것을 염려해 어린 선수들을 벤치에만 앉혀둔다면 그들은 성장할 수가 없다. 4월 한 달 동안 9경기를 치른다. 5월도 마찬가지로 K리그와 ACL 경기를 오가는 정신없는 일정들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베스트 멤버들만 출전시킬 수 있겠나. 감독이 확신을 갖지 않고선 선수 구성을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정말 잘해줬다. 난 거기서 희망을 봤다.”
황 감독에게 ‘빵빵한’ 외국인선수가 있는 FC서울, 수원삼성 등 빅클럽이 부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황 감독은 “당연히 부럽다. 데얀같이 훌륭한 선수가 우리 팀에 있다면 걱정이 없을 것 같다”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현실을 빨리 인정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팀에 외국인선수는 없다. 대신 재미있게 축구하자. 결과에 대해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이전보다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게 확 줄었다.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수들 입장에선 외국인 선수가 없다 보니 수비에선 불안하고 공격수 입장에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불안과 기대가 공존할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진 잘 견뎌내고 있다. 선수들이 종종 대견해 보일 때가 있다.”
지난 2월 27일 포항스틸야드에서 열린 베이징 궈안전을 앞둔 황 감독은 선수단 미팅 때 이런 얘길 전했다고 한다.
‘베이징 궈안이 강팀이라 너희들 불안하니? 난 솔직히 설렌다. 우리가 불안한 마음을 갖고 경기를 하는 것보단 기대감을 갖고 들어가는 게 맞다. 동계훈련 때 너희들이 보여준 축구를 경기장에서 펼쳐 보이자!’
포항은 그 경기에서도 0-0무승부를 기록했지만 베이징 궈안의 선수 구성을 살펴보면 결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베이징에는 '아프리카 앙리'라 불렸던 프레데릭 카누테와 이적료만 57억 원을 주고 데려온 에콰도르 국가대표 출신 호프레 퀘론이 존재했다. 경기 전 베이징 팀의 비디오를 보고 ‘아차’ 싶을 정도로 멤버가 훌륭했다. 중앙 수비는 물론 양쪽 측면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 선수들과 싸운다는 게 부담스럽지만 선수들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다. 무승부로 끝난 데 대해 오히려 감사할 정도였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요즘 최용수 감독한테서 전화가 안 오네. 작년까지만 해도 자주 전화해서 안부를 묻더니만….”
황선홍 감독은 동시대에 축구를 했던 후배들이 지도자로 돌아오는 게 반갑기만 하다. 승부의 세계에선 적장으로 만나지만, 사석에선 계급장 떼고 형, 동생으로 어울리는 사이라 젊은 지도자들의 등장은 묘한 긴장과 흥분을 맛보게 한다.
“서로 걸음마 하는 단계이다. 최 감독이 지난해 우승했다고 해서 지도자로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6년차 감독이라고 해서 베테랑 지도자가 된 것도 아니다. 서정원 감독 또한 수원 삼성이라는 빅클럽을 이끈다고 해서 명장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다. 지금은 각자 시험을 치르는 상황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과 함께 프로팀 감독으로 경쟁을 펼친다는 게 재미있다. 지면 더 아프고, 이기면 더 기쁠 수 있는 후배들이자 라이벌들이다.”그런 점에서 황 감독은 일찍 낙마한 신태용, 유상철 전 감독들이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제대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조기에 감독직에서 물러난 부분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과 같이 계속 시험을 치렀다면 얼마나 재밌었겠나. 다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기 싸움이 팽팽했을 것이다. 그리고 K리그 클래식에 더욱 풍성한 스토리가 담겨졌을 것 같다. 상대에 대해 더 많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고민했을 지도 모른다. 난 그런 긴장감이 좋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린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그런 맥락에서 비록 다른 팀이지만 이천수, 차두리의 K리그 클래식 복귀에 대해서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모든 스포츠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승패에만 얽매인 얘기에 대해 팬들은 관심이 없다. 선수들에 관한 스토리가 많아질수록 K리그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고 본다. 보고 싶은 선수를 K리그 그라운드에서 볼 수 있다는 게 팬들 입장에선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 점에서 난 (박)지성이나 (이)영표도 프로야구의 박찬호 씨처럼 축구 인생의 마지막을 K리그에서 마무리해줬으면 한다.”
황 감독은 팬들이 두 선수한테 원하는 건 프리미어리그 시절의 화려한 플레이가 아니라 K리그 그라운드에서 뛰는 두 선수를 보는 그 자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K리그에서 뛰는 건 결코 자존심 상할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것. 황 감독은 K리그의 흥행과 스토리를 위해선 더 많은 해외파 선수들이 돌아오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4월과 5월 ‘죽음의 일정’을 앞두고 있는 황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여운이 있는 ‘스토리’를 전해줬다.
“터키 전지훈련지 숙소 앞이 바닷가였다. 바닷물이 엄청 차가웠는데, 그때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내 자신과 두 가지를 약속했다. 하나는 어떤 힘든 상황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끊임없이 나한테 ‘네가 과연 잘하고 있느냐? 더 많이 노력하고 공부하고 있느냐?’라고 되묻자는 내용이었다. 좋지 않은 결과로 인해 여론이 들끓고 팬들이 날 내몰려고 해도 난 올 시즌 냉정을 잃지 않고 내 길을 걸을 것이다. 그게 고생하는 선수들에 대한 예의이고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