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검은 양복 입고 야구장에 온 까닭
사실 어린 시절에는 여자 아이가 무슨 야구냐며 부모님께 핀잔을 듣곤 했었다. 주변 또래들 중에 야구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없었던 것도 물론이었다. 요즘은 그때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야구장을 가보면 여성동지들이 몰라보게 늘었다. 여성팬들이 늘어서 신이 난 것은 비단 나 같은 여성팬들뿐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덩달아 신이 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이상 여자 친구나 아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불행히도 이런 행운을 가진 남자들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전히 많은 남자들이 집에서 리모컨 싸움을 하거나, 아니면 야구장 한 번 가기 위해서 수시로 거짓말을 해대고 있다. 친한 동생의 이야기를 해보자.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A는 말 그대로 야구에 미친 야·구·광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LG 트윈스에 죽고 못사는, 골수 LG 팬이다. 어린 시절 MBC 청룡 어린이 회원이었던 A의 LG 사랑은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도 여전히 차고 넘친다. 오죽하면 회사까지 LG 계열사로 지원했을까.
이렇듯 회사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의 LG 사랑은 자부심이자 자랑거리다. 하지만 이런 그의 열정이 기를 못 펴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으니, 바로 집에서다. 야구에 미쳐있는 남편의 모습이 A의 아내에게는 영 달갑지 않은 모양. “나는 야구가 싫어. 싫어도 너~무 싫어”라고 경기를 일으키는 아내 앞에서 A가 대놓고 야구장을 드나들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일을 어찌할까.
그래서 생각 끝에 A는 일종의 ‘점수 따놓기 작전’과 ‘첩보 작전’ 두 가지를 병행하기로 했다. ‘점수 따놓기’는 비시즌인 가을 겨울 때나 평상시에 완벽한 남편과 아빠로서 점수를 왕창 따놓는 방법이다. 이럴 때마다 A는 돌쇠로 빙의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전 아이들 밥 챙겨주기는 기본이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달려가서 저녁을 손수 짓기도 한다. 청소도 곧잘 한다. 심지어 이 기간 동안에는 좋아하는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 귀가했다가 괜히 점수가 깎일까봐서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은 포인트는 3월, 봄이 되면 슬슬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동안의 노고를 인정해 주기라도 하듯 아내는 퇴근 후 야구장에 다녀오겠다는 남편의 말을 못 이기는 척 들어준다.
그렇다 해도 포인트는 언젠가 소멸되게 마련. 아내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할 때쯤이면 A는 ‘첩보 작전’을 시작한다. ‘첩보 작전’은 대개 올스타전이 지나고 하반기 시즌이 시작되는 한여름 무렵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A는 자전거를 타고 외출을 하곤 한다. 저녁 식사 후나 퇴근 후, 아내에게 “자전거로 한강 좀 돌고 올게”라고 말한 후 바로 잠실로 직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A가 야구장에 민망한 자전거 복장으로 나타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집이 잠실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 유니폼을 입고 싶은 날에는 출근할 때 아내 몰래 쇼핑백 바닥에 유니폼을 숨겨 나오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다.
주말에는 이른바 ‘주말용 레퍼토리’가 가동된다. A가 주말마다 홀라당 태워먹은 회사 공장은 이미 여러 채요, 본의 아니게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부장님, 거래처 사장님의 아버님과 어머님도 한둘이 아니다. 덕분에 A가 야구장에 검은 양복을 입고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최근에 함께 야구를 보다가 눈이 맞아서 결혼한 커플을 보고 A가 가장 먼저 한 말 역시 “정말 부럽다. 나도 야구 좋아하는 여자 만날걸. 이런 젠장~”이었다.
하긴 “여자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걸 왜 싫어하는지 몰라”라고 투덜대는 남자들이나 “남자들은 저렇게 재미도 없는 걸 뭐 하러 세 시간 넘게 보고 앉아있는지 몰라”라고 삐치는 여자들이나 양쪽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저 확실한 것은 역시 남자는 화성에서, 그리고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는 사실. 우리는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다.
그리고 물론, 올 시즌에도 A의 첩보 작전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시즌도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A를 위해 빌어본다. 그리고 LG 트윈스도 파이팅이다. ‘올해는 다르다’가 부디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래야 A의 노력도 헛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김태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