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를 외제차로 커버?
왜소한 체구가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작은 키가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후 각자 몰고 온 자동차를 타려고 돌아선 순간, 나는 A의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A의 자동차는 커다란 SUV였고, A는 높은(?) 운전석에 올라타기 위해 발을 높이 든 채 낑낑대고 있었다. 오 이런. 순간 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호감마저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고, 다른 이유를 대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글쎄?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일은 몇 년 후에 벌어졌다. 소개를 주선했던 후배가 A의 결혼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A의 직장 동료이기도 한 후배는 A가 장가를 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고민한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리고 친절하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형, 장가가려면 당장 자동차부터 바꿔. 우선 SUV는 버리고, 세단형 외제차를 사.” 이런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A는 중고 외제차를 구입했고, 거짓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개로 만난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여기에는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외제차를 타기 시작하면서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을 테고, 이런 변화가 태도와 얼굴 그리고 말투에서 배어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 역시 남자의 외제차에 작은 키를 묻어 버리는 나름의 계산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작은 키를 고급 승용차로 커버해 자존심을 세우는 남자는 의외로 많다. 평소 알고 지내는 후배인 B 역시 작은 키의 소유자다. B는 얼굴도 미남형인 데다 유복한 집 외동아들이지만 늘 170㎝ 정도 되는 작은 키가 불만이라고 했다. ‘헌팅의 대가’인 데다 워낙 여자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B는 길을 갈 때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무조건 말부터 걸면서 데이트 신청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일명 뚜벅이로 걸어가면서 헌팅을 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B는 털어 놓았다. 적어도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면서 헌팅을 하거나 혹은 뚜벅이로 만났다고 하더라도 후에 집까지 스포츠카로 에스코트를 해주면 십중팔구 애프터는 성공이라고 했다.
물론 남자의 자존심이란 게 이렇게 외적인 면으로만 세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짜 자신감 있는 남자들은 굳이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에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내가 남자들의 자동차, 키, 그리고 연봉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된 걸 보면 나도 이제 철이 들긴 들었나 보다.
김태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