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불장난을 저지른 듯한 두 사람의 ‘처지’는 그날 이후 피의자와 피해자로 극명하게 엇갈렸다. 남자는 강간 혐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야 했고, 여자는 그날의 ‘악몽’을 세세히 진술해야 했다.
지난해 ‘반미’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은 그다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한국 중년남이 딸뻘 되는 외국 여성, 그것도 주한미군 여병사와 가진 ‘성관계’는 법조계에서 적잖은 논란을 불렀다. 강간 혐의를 받던 이 남성의 유무죄를 놓고 1심과 2심 재판부가 서로 상반된 판단을 내렸을 정도. 급기야 최근 대법원은 다시 유죄 취지로 원심을 파기함으로써 이번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 이국 남녀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먼저 1년 전 ‘그날’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지난해 9월 어느 날. 당시 19세였던 미국인 여성 제인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밟는 이국땅.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제인은 미 공군에 입대했고, 6개월 만에 첫 해외부임지인 주한미군으로 배속됐다.
그러나 막상 한국땅을 밟았지만, 최종 목적지인 군산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각.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려봤지만 이미 막차는 끊긴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ARMY CAB’(군용 택시)이라는 선명한 글씨가 적힌 택시 한 대가 제인 앞으로 다가왔다.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는 40대 후반의 한국 남자 김아무개씨. 김씨는 자신을 미공군 소속이라고 소개했다. 공항에 내린 미군 병사를 부대로 데려다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뜻 군산까지 무료로 태워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씨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인데다 사실 돈도 없었고 뾰족한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제인은 김씨의 말을 믿고 택시에 올랐다. 제인은 피곤함과 안도감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윽고 택시가 멈춰 섰다. 벌써 군산인가? 아니었다. 멈춘 곳은 한 모텔의 주차장이었다. 갑자기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못 알아듣는 한국말 사이에 귀에 익은 영어가 들렸다. ‘S·E·X’라는 단어였다. 김씨는 제인에게 성관계를 요구했다. 제인은 김씨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모텔 프론트로 다가갔다. 프론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었지만 제인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307호실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김씨가 노골적으로 키스를 하려 했다. 제인의 상의가 벗겨지고 남자의 손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생리중이던 제인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제인이 화장실에서 나온 뒤 남자는 제인을 침대에 눕혔다. 하의와 속옷이 벗겨졌다. 제인은 약간 몸을 비틀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김씨는 제인을 인천공항에 데려다줬다. 제인은 버스를 타고 군산기지를 찾아갔다. 기지에 도착하자마자 제인은 미공군 특수수사대에 어젯밤 ‘일’을 알렸다. 특수수사대는 즉각 김씨를 강간 혐의로 붙잡았다. 법조계에서 유무죄 논란을 부른 미군 여병사 성폭행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검찰의 기소로 강간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김씨.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김씨에 대해 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김씨는 ‘말도 안되는 판결’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군말 없이 모텔방으로 따라 들어온 여자와 잠자리를 했을 뿐인데 어떻게 강간이냐는 주장이었다.
현행 형법 297조를 보면, 김씨의 주장이 전혀 ‘말이 안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조항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여자를 강간할 때’ 강간죄가 성립된다고 규정돼 있다. 다시 말해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폭행 또는 협박을 해서 피해자가 항거 불능 상태이거나 저항이 매우 곤란하게 된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여러 차례 대법원 판례를 통해 확정된 강간죄에 대한 해석이었다.
김씨는 우선 ‘모텔 주차장에서 섹스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또 모텔 방안에서도 폭행을 행사하거나 협박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신이 강간범이냐고 하소연했다.
김씨는 당연히 항소했고, 2심 재판은 서울고등법원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2심 재판 양상은 1심과 판이하게 진행됐다. 2심 재판부는 지난 5월 김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린 근거는 이랬다.
우선 모텔 주차장에서 김씨가 섹스를 요구했을 때 제인이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모텔 프론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었지만 제인이 아무런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사실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인은 또 모텔방으로 들어간 뒤 다시 프론트로 나왔을 때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제인은 오히려 프론트에서 국제전화카드를 빌려서 미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20분 가까이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 뒤 다시 모텔 방에서는 팬티만 입고 방을 돌아다녔고, 생리중이라 착용하고 있던 패드도 본인 스스로 제거했다는 점도 김씨가 강간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무죄 판결의 근거는 김씨가 성교를 시작했을 때 제인의 반응이었다. 제인은 몸을 약간 비틀기만 했을 뿐 침대에 계속 누워있었으며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날이 밝은 뒤 제인의 행동도 석연치 않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제인은 김씨가 아침밥을 먹으러 밖에 나갔을 때도 도망가지 않고 방에 혼자 남아 있었다. 또 김씨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 줄 때도 서로 대화를 나누며 ‘오붓한’ 분위기였다는 것. 이런 모든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김씨가 제인을 강간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2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번엔 제인이 펄쩍 뛰었다. ‘명백한 강간범을 무죄로 풀어주다니….’ 검찰측은 2심 재판 결과에 납득할 수 없다며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런데 대법원의 분위기는 또 한 번 반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난달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2심 재판부의 판결을 뒤집었다.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잘못된 판결이라는 내용이었다. 대법원이 이 같은 판단을 내린 정황은 이렇다.
강간을 저지를 때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는지는 당시 벌어진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당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서 제인의 심리상태까지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씨가 주차장에서 섹스를 제안했을 때, 제인은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비록 명시적으로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내심 ‘큰일났구나’ 하면서 매우 당황해 했다는 것이다. 극도의 공포심을 갖게 된 상황에서 김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제인은 자신이 폭행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또 ‘프론트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같은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는 제인의 말도 대법원은 받아들였다. 또 도망간다 해도 낯선 땅에서 어디가 어딘지도 알 수 없어 그마저도 포기했다는 주장도 인정했다.
결정적으로 성교 당시 완강히 저항하지 않았던 것도, 제인은 더 큰일을 당할까봐 무서워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해명했다.
이런 사실을 모든 종합해 볼 때, 제인은 심리 상태가 매우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김씨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씨가 제인에게 반항을 못하도록 한 뒤 강간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었다.
이번 판결은 법률적으로 의미가 크다는 게 법조계의 평이다. 어디까지를 강간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경계선에 걸친 사건이라는 점에서다. 결국 눈에 보이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더라도 여성이 심리적으로 공포심을 느낄 정도의 상황이라면 강간이 성립된다는 쪽으로 결론은 기울었다.
이승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