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는 경찰 진술에서 “불경기 여파로 미국에서 취업하려고 비자 발급을 의뢰하는 여성들이 늘었고 특히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유흥업소 여성들이 해외 진출을 위해 비자 발급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유흥가 여성들이 성매매 단속을 피해 해외로 진출한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양씨가 여성 1명당 받은 비자 부정발급 ‘수수료’는 8백만원 안팎. 지난 3년간 그가 브로커 일로 벌어들인 돈은 최소 25억원에 이른다. 경찰 관계자는 국내 경기가 불황일수록 양씨는 호황을 누렸다고 전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구속된 양씨 역시 3년 전 일자리를 구하러 미국으로 가기 위해 또 다른 비자 브로커와 접촉하면서 이들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는 점.
과거 휴대폰 단말기를 판매하던 양씨는 경기침체로 돈벌이가 안 되자 지난 2001년 1월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비자를 받는 과정에서 이 사건의 공범으로 일명 ‘김 사장’이라 불리는 또 다른 브로커 김아무개씨(38·국내모집책·수배중)의 도움을 받았다. 김씨가 위조서류로 자신의 비자를 받게 해주고 단번에 목돈을 버는 것을 보고 양씨는 미국 취업을 포기하고 김씨와 ‘동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했던가. 어느새 양씨의 ‘솜씨’는 김씨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양씨는 주민등록등본, 예금잔고증명원, 위임장 등을 컴퓨터와 컬러프린터를 통해 정교하게 위조하고 동사무소 직인까지 감쪽같이 위조하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다. 경찰 관계자는 “양씨가 범죄자이긴 하지만 어찌나 성실한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해 범행수법을 계속 개발해왔다”고 밝혔다.
양씨는 이내 실력을 인정받아 국내 비자 브로커 총책이 되었고 ‘선배’인 김씨는 모집책 역할을 했다. 양씨는 미국에 있는 또 다른 피의자 셀리(35·한국계 미국인)가 인터넷 사이트에 비자 발급 알선 광고를 게재해 의뢰 여성들을 모으거나 김씨가 국내에서 여성들을 모집해오면 각자에게 필요한 서류들을 만들어줬다.
▲ 압류된 양씨의 물품들. | ||
실제로 양씨에게 비자 발급을 부탁했던 여성들은 미국 현지 업소에서 일하려는 유흥가 아가씨들이 대다수였다. 양씨는 각종 서류를 교묘하게 위조해 이들을 모두 국내 유명 대기업 직원의 부인으로 ‘둔갑’시켰다.
경찰에 따르면 양씨는 한 여행사 직원으로부터 대기업 직원들의 신상명세를 넘겨받아 활용해왔다고 한다. 의뢰 여성들에게 해당 직원의 인적사항, 가족관계, 직장 전화번호 등을 외우게 하고 사전에 인터뷰 요령과 옷차림새 등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해 이들이 쉽게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했던 것.
양씨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의뢰 여성들과 일명 ‘대포폰’(다른 사람 명의로 된 휴대폰)으로만 통화를 했고, 물증이 남지 않도록 대사관 인터뷰가 끝나면 의뢰 여성들에게서 위조된 서류 모두를 넘겨받아 없애버리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범행은 사실상 완전범죄에 가까웠다. 경찰 관계자는 “양씨는 대사관의 비자발급이 서류심사만으로 끝나는 점을 이용했는데 자신의 범행이 발각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러나 탈이 난 진원지는 바로 미 대사관이었다. 미 대사관측은 최근 급증한 젊은 여성 비자 신청자들 가운데 인터뷰에서 의심스러운 구석이 발견된 10명의 관련 서류를 복사해 서울경찰청 외사과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의 확인 결과 이 여성들 모두 위조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해당 여성들의 뒤를 추적해 양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양씨는 비자 브로커로 큰 돈을 만지게 되면서 씀씀이 또한 헤퍼졌다고 한다. ‘명품족’으로 변신한 양씨가 최근 1, 2년 사이에 4억5천만원짜리 아파트를 사들였고, 평소엔 1억2천만원 상당의 최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녔다는 것.
서울경찰청 외사과 박두기 반장은 “양씨는 검거 당시에도 지갑에서 5천만원짜리 수표를 꺼내 건네면서 ‘풀어달라’고 부탁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경찰 수사 결과 양씨는 2001년부터 3년 동안 모두 3백22명의 여성으로부터 약 25억원을 수수료로 받았고 이 가운데 2백50명은 실제로 미국 땅을 밟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양씨는 경찰 조사에서 “최근 들어 비자발급을 의뢰하는 여성들이 늘었고 특히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의뢰 건수가 30%이상 늘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양씨가 보유하고 있던 대기업 직원의 신상정보가 모자라서 남자 1명당 의뢰 여성 5명의 비율로 서류를 위조할 정도였다고 한다.
새 ‘일자리’를 얻기 위해 기를 쓰고 미국으로 가려 하는 일부 유흥가 여성들. ‘밤거리의 아메리칸드림’이 계속되는 한, 아마도 제2의 양씨와 같은 브로커들 또한 계속 출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