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저격 결의 ‘단지동맹비’ 우뚝
역사소설가 이수광 작가가 쓴 <대륙의 영혼 최재형>의 한 부분이다. 함경도 경원의 노비 출신으로 알려진 최재형 선생 일가가 가뭄과 역병 그리고 탐관오리의 횡포를 못 이겨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향하는 장면이다. 당시 국경을 넘던 조선인들의 마음은 불안과 희망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고향에 대한 애잔함이 마구 뒤섞였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의 기록은 1963년 13가구가 국경을 넘어서면서부터다. 고려인문화센터 김 발레이아 선생에 따르면, 이는 사료에 기록된 역사일 뿐 아마도 훨씬 이전부터 조선인들의 이주는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크라스키노(연추) 중심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왼쪽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단지 동맹회 인사들이 흘린 핏방울을 형상화한 기념물. 가운데 열다섯개 돌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의미한다.
최초 이주민들이 정착했던 곳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조선과 그리 멀지 않은 연해주 남부지역이었다. 지금은 크라스키노로 명명된 해당 도시는 고려인들에겐 ‘연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일요신문> 취재진은 4일 새벽부터 이 지역 탐방을 위해 부지런히 짐을 쌌다.
해당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4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오지였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취약한 도로 사정 탓에 소요시간이 제법 됐다. 그나마 최근 들어 러시아 정부가 관심을 들여 연해주 지역 도로를 개보수했다지만, 여전히 길 중간 중간엔 비포장도로가 이어졌다. 전날 폭우가 내린 탓에 도로 사정은 더욱 좋지 못했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자, 연해주의 광활한 대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천부적인 농업민족인 조선인들이 그 옛날부터 이곳으로 넘어간 까닭은 분명해 보였다. 개간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젖줄이자 희망이었을 터.
흥미로운 사실은 고려인 이주 100년이 훌쩍 넘은 현재, 이곳 연해주 대지를 개간하고 농산물을 생산하는 이들도 한국의 기업이라는 것. 또한 최근 한국인 사업가들은 이 지역에 러시아 전통 별장인 ‘다차’ 임대업으로 쏠쏠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취재진은 크라스키노로 향하던 도중 다차 임대업을 하는 한 한국인이 지하수 시공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 연해주의 개척사와 한민족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광활한 대지를 달려온 지 약 세 시간이 지나 취재진은 크라스키노 길목의 ‘비노그라드노예’라는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전에 ‘지신허’라고 불리던 곳으로 고려인의 연해주 최초 정착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2005년 연해주에서 콘서트를 열었던 한국의 대중가수 서태지는 이곳을 기념해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 비석에 따르면 지신허는 극동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로 1937년(스탈린 강제이주 정책 시기)까지 1700여 명이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으며 한인들의 발원지가 되는 곳으로 의미가 깊었다. 물론 이 역시 현재는 터만 남아있었다.
취재진은 지신허 길목까지만 살펴볼 수 있었다. 러중 국경으로 삼엄한 군사 통제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국경수비대의 허가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개방된다고 한다. 먼발치에서 바라본 지신허는 야트막한 구릉 지대였다.
크라스키노 도시 명칭은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크라스킨 중위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사진은 크라스킨 중위 동상.
크라스키노에 들어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연추하리’였다. 그 중심에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지동맹비는 2001년 광복회와 러시아 고려학술문화재단 등의 노력으로 이곳 러시아 땅에 세워졌다. 하지만 관리 소홀과 러시아 정부의 비협조로 인해 수차례에 걸쳐 자리를 옮겼고, 우여곡절 끝에 2011년 현재의 자리에 정착하게 됐다.
기념물은 무척이나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지인들을 통해 그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겨 나가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한 손도장이 새겨져 있는 흑색의 거대 석상이 취재진을 압도했다. 그 거대 석상은 10년 단위의 연도가 새겨져 있는 ‘시간의 길’로 이어졌고, 그 길 끝자락에 야트막한 또 다른 검은 석상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작은 석상은 안중근 의사의 희생을 발판 삼아 나아간 현재의 ‘우리’를 뜻했다.
그리고 이 석상들 한 가운데 열다섯 개의 돌들이 바닥에 알알이 박혀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죽기 전 남긴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의미한단다. 그리고 기념물 목전에 세워진 기념비는 당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단지 동맹회 인사들이 흘린 핏방울을 형상화했다. 웅장한 석상에 새겨진 안중근 의사의 단지한 손도장을 보고 있자니, 당시 투사들의 비장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이곳 연추 지역은 단지동맹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실제 안중근 의사와 인연이 깊다. 그가 이곳 연해주 땅에 온 것은 1907년의 일이다. 정확히 이토 저격 2년 전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국내 지역에서 어려웠던 의병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었다. 안 의사는 이곳에서 1908년 최재형 선생이 주도로 조직한 의병조직 동의회에 가담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이 부대는 연추의병대로 불리기도 했다.
후에 기술하겠지만, 이 동의회와 안중근 의사를 후원한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기획 주체가 바로 이 동의회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이토를 암살하기 약 8개월 전 이곳 연추의 한 여관에서 11명의 독립투사들과 단지 결의를 맺는다. 이것이 바로 동의단지동맹이다.
포시에트 길목의 옛 일본 공군 비행장과 마을 앞에서 발견한 연자방아 돌. 안 의사가 거사를 위해 배를 탄 포시에트항(위부터 아래로).
취재진은 포시에트로 가는 길목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포구 마을인 포시에트에 들어서는데 해안가 쪽에 광활하고 범상치 않은 평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해안가의 이 광활한 평지는 당시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일제 공군부대의 비행장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폐허로 변했고, 게다가 한여름 무성한 잡초 탓에 옛 흔적을 찾기 어려웠지만, 그 규모는 대단했다.
취재진은 마을 길목에서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현지인이 포시에트 개항 50주년을 기념해 문을 연 민간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마당 한 가운데에 뭉뚝하게 생긴 돌덩이들이 눈에 들어온 것. 한눈에 봐도 우리네 연자방아의 주춧돌과 윗돌이었다. 연자방아는 수확한 곡식을 빻는 데 꼭 필요한 우리 특유의 민속 농기구다. 연해주 한 가운데에서 만난 이 연자방아의 부속물에서 이곳이 곧 예전 우리 조상들의 터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지인에 따르면, 지금도 연해주 곳곳에는 이러한 당시 정착민들이 남겨 놓은 농기구들을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을 길목을 지나 드디어 포시에트 항구에 이르렀다. 말이 항구이지 실상은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현재 포시에트 항구는 주로 러시아 국내에서 채광한 석탄들을 취급하는 산업항으로 유명했다. 실제 취재진이 항구를 찾았을 때도 항구 내 노동자들과 중장비들은 석탄 운반이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안중근 의사는 배를 탔다. 민족의 원수 이토의 심장을 쏘기 전, 약지를 자르고 결의를 한 안 의사의 당시 심정은 어땠을까.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 하나였다. 공교롭게도 기자의 나이도 서른하나다. 106년이 지난 현재, 기자는 안 의사의 발자취가 끊겼던 포시에트 항에 서서 당시 안 의사의 속마음을 조심스레 상상해 봤다.
<일요신문>은 안중근 발자취가 남아있던 연해주 남부를 벗어나 연해주 북부 지역으로 내달렸다. 연해주 북부 지역에 자리한 우수리스크에는 우리 고려인들의 큰 아픔이 담겨 있었다. 취재진은 그 아픔을 담고자 북쪽으로 올라갔다.
러시아 크라스키노·포시에트=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