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러나 이천수가 가벼움 속에서 진지함을 찾아가는 스타일이라면 최성국은 특유의 진지함과 성실함을 ‘무기’로 삼는 쪽이다. 그래서였을까. 오랜만에 기자와 만난 최성국은 어느새 훌쩍 ‘어른’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카타르 도요타컵 올림픽대표팀 초청대회에서 MVP를 거머쥐며 올림픽팀의 부동의 공격수로 자리를 확고히 한 최성국은 일찌감치 20세 이하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 그리고 성인대표팀에까지 선발되는 전천후 태극전사로 그 가치를 견고히 다졌다. 오라는 데가 많아서 행복한 비명을 지를 만도 했지만 각기 성격이 다른 대표팀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데 따른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지난 1월29일 서울 광화문 부근의 한 음식점에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나타나 기자의 ‘원성’을 산 최성국은 그대신 자신감과 당당함이 배어 있는 기대 이상의 솔직한 멘트로 좌중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요즘 최성국의 이름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독도 골세리머니’였다. 지난 카타르 도요타컵 준결승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두 번이나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다’란 문구가 쓰인 속옷 골세리머니를 펼친 바 있기 때문. 최근 독도 문제가 양국 간의 첨예한 관심사로 떠오른 터라 최성국의 골세리머니는 즉각 네티즌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관심을 모으는 부분은 바로 오는 2월21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한·일 올림픽대표 평가전. 최성국은 이번엔 일본어로 골세리머니를 펼칠 계획을 세웠지만 정치적인 이슈를 내세운 골세리머니는 FIFA로부터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독도에 대한 ‘갑작스러운’ 관심이 조금은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평소 독도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어요. 그러다 우표 발행과 관련해 일본이 또다시 독도 소유권 시비를 일으키고 있다는 걸 TV를 통해 알게 되었고 국민들에게 뭔가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골세리머니를 구상한 거죠. 사실 정치는 재미가 없어서 잘 몰라요. 신문도 일간지보다는 스포츠신문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오거든요. 하지만 대표선수라는 타이틀을 단 이상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슈화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도 골세리머니’를 했다는 이유로 요즘 정치·경제에 대해 질문을 하려는 기자의 생각을 꿰뚫고(?) 있는 듯 최성국은 미리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확실한 선을 그었다.
그대신 ‘본업’인 축구를 시작한 동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축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절실한 사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기엔 생활이 너무 힘들어 철이 들지 않은 어린 나이에도 돈의 필요성, 중요성에 대해 절박함을 느꼈다고 말할 정도니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겠다는 마음이 굳어진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인지도 몰랐다.
▲ 최성국의 어린 시절 모습. | ||
물론 집이 있었더라면 화물차 생활은 안했겠죠. 그땐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친구도 없었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생활하는데 처음엔 움직이는 차에서만 잠을 잔 습관 때문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축구를 시작한 뒤 누나들은 저 때문에 대학도 못 들어가고 상고에 진학했어요. 없는 집에서 운동선수를 키우려다보니 살림살이가 들썩거릴 정도였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했어요. 돈을 벌면 절 위해 고생한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거든요.”
아직까지 누리고 살 만큼의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뒤늦게 누나들의 대학 학자금을 지원하면서 모처럼 ‘쓰고 사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최성국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는 바로 현란한 헤어스타일이다. 그가 ‘머리’에 커다란 변화를 주는 데엔 나름대로의 타당한 이유와 의미가 숨어 있었다.
축구선수로선 작은 키와 체구, 그리고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외모는 그라운드에서 그의 존재를 더욱 작아보이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어떻게 하면 튈 수 있을까.’ 유니폼을 벗고 뛸 수도 없고 경기 때마다 골을 넣어서 실력을 인정받기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독특한 헤어스타일이었던 것.
“노랑머리, 빨강머리로 물들이고 그라운드에 나타나자 말들이 많았어요. 먼저 실력으로 인정받을 생각을 하라고. 하지만 실력과 함께 개성도 발휘하면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고집스럽게 염색머리를 애용했죠. 고려대에 입학했을 때 방송국 마이크가 제 앞으로 온 적이 있었어요. 각오를 말해달라는 주문에 ‘천수형, 두리형처럼 뜨고 싶다’고 했던 기억이 잊혀지질 않아요. 이렇게 빨리 제 이름이 알려질 줄 몰랐어요.”
전통주점을 겸한 음식점에서 시음주로 나온 술을 홀짝거리며 마시던 최성국은 “술은 역시 소주가 최고”라며 소주 예찬론을 편다. 평소 전통주를 마실 기회가 없어서인지 시음주에 큰 호기심을 나타내지 않다가 맛만 본다며 산사춘, 흑미주 등을 두루 마셔보곤 취기를 느낀다고 엄살을 떤다.
“사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버지한테 처음 술을 배웠는데 운동하느라 술 마실 기회가 많지 않아서인지 술과 그리 가깝지 못한 것 같아요. 대학 시절 선배들의 강권에 못 이겨 소주 4병까진 마셔봤는데 왜 그런 술을 마셔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술 먹고 취해본 적이 없으니 술에 관한 에피소드도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다고 한다. 해삼, 멍게, 미더덕, 수정과 등은 비위가 약해 먹질 못하고 생선회와 보신탕은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한마디로 ‘정리 불가능’한 식성인 셈이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그리고 프로팀까지 ‘바늘과 실’처럼 붙어다닌 이천수는 최성국의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특히 축구 외적인 생활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한 친구 같은 선배이자 형으로 최성국한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그런 와중에도 이천수가 오히려 최성국한테 배운 노하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여자 꼬시는 작업 멘트’다.
“만약 어느 카페에 갔는데 알바(아르바이트)생이 예쁘다고 쳐요. 그럴 땐 메뉴판을 보면서 친근감을 유도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콜라 있어요? 그럼 사이다 주세요’라든가 ‘오늘 딸기 주스 맛있어요? 그럼 제가 한 잔 사드릴게요’ 하면서 친해진 뒤 계산하고 나갈 때 연락처를 물어보면 쑥스러워하면서도 적어주거든요. 그런데 천수형은 말이 아니라 돈으로 ‘작업’하는 것 같았어요. 얼마나 여자한테 돈을 잘 썼는데요.”
▲ 최성국은 이천수(오른쪽)한테 여자 유혹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 ||
수원과학대 항공학과를 졸업한 뒤 직장을 알아보다가 최성국과의 만남 때문에 사회생활을 포기한 순정파란다. 직장에 다녀 자신마저 시간에 얽매이면 ‘이 팀 저 시합’ 차출로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최성국과의 만남에 제약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고. 현재 그녀는 최성국을 향해 ‘온리 유’하며 신부수업중이라고 한다.
“천수형이 미스코리아, 슈퍼모델, 연예인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전 별로 그런 분들한테 관심이 없었어요. 예쁜 여자 좋아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저와는 눈높이가 다를 것 같았어요. 전 가난하게 살아도 돈의 가치를 알고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를 원했거든요.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딱 제 타입이에요.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외국어도 잘하고 제 말도 아주 잘 들어요. 나중에 봐야 하겠지만 이변이 없는 한 그 친구랑 결혼할 것 같아요.”
양가 부모님도 두 사람의 교제를 허락한 상태고 결혼까지 고려중이지만 최성국의 아버지는 아들보다 한 살 어린 며느리감을 때로 불안하게(?) 바라본다고 한다. 나이가 어린 탓이다.
“아버지는 제가 운동 갔다왔는데 그 친구가 밥도 안해주고 그래서 제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이래요. 나이가 어려서 혹시 운동선수의 삶을 견디고 이해하지 못할까봐 우려하시는 거죠. 찾으면 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자면 한도 끝도 없잖아요. 일찌감치 결혼할 여자를 정해놓고 운동에 전념하면 축구가 더 잘될 것 같지 않으세요? 이 점에선 천수형도, (박)지성이형도 제가 무척 부러울 거예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사단에 정조국(안양 LG)과 함께 연습생으로 참가하며 성인대표팀에 처음 발탁됐을 때 숙소에서 안정환을 보고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는 최성국. ‘정환이형’ ‘명보형’이라고 호칭할 수 있는 현재의 ‘신분 상승’에 진솔한 감사를 전한다.
“저 같은 사람이 운동선수라는 사실에 감사하는 이유는 실력만 있으면 얼굴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 때문이에요. 얼굴 잘생겼다고 해서 해외 진출하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개성 넘치는 외모를 축구선수의 장점으로 부각시킬 줄 아는 ‘영리한’ 최성국은 히딩크 감독을 카리스마 강한 감독으로, 쿠엘류 감독을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이미지로 분류하며 자신은 히딩크 감독보다 쿠엘류 감독이 훨씬 편하다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아마도 히딩크 감독 시절 연습생으로 들어가 온갖 눈치보며 ‘시다발이’를 자처했던 생활의 불편함이 히딩크 감독의 이미지와 함께 떠올랐기 때문일 게다. 쿠엘류 감독이 ‘성국 내 사랑’이라고 할 만큼 다른 어떤 선수보다도 최성국을 아끼고 신뢰하는 현 상황도 최성국의 마음을 풀어주는 요인일 수도 있겠다.
비록 얼짱, 몸짱은 안 돼도 실력짱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리틀 마라도나’ 최성국. 과연 2004년, ‘최성국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