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여자프로농구에 데뷔한 스무살 두 새내기들의 수다는 그들의 웃음만큼이나 맑고 밝았다. 왼쪽이 신혜인, 오른쪽이 정미란.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마치 ‘마담 뚜’ 같은 심정으로 두 사람의 스케줄을 짜 맞추다가 가까스로 뽑아낸 시간이 점심 무렵. 어차피 두 사람과 ‘찐하게’ 술을 마실 수 없다면 대낮에 가벼운 낮술로 기분을 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마침내 지난 23일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 내 상가에서 밝고 맑고 천진난만한 스무 살(미디어용은 만 19세지만 실제 나이는 85년생, 20세다) 두 숙녀와 ‘맥주 토크’를 즐길 수 있었다.
‘언니, 동생’도 아니고 ‘이모와 조카’뻘이 되는 나이 차이로 인해 두 사람과의 ‘취중 토크’가 마냥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지만 기자가 수준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두 친구가 수준을 높여준 것인지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로 데뷔 첫해인 올 시즌, 신인왕에다 챔프전 우승까지 차지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정미란과 ‘얼짱’이란 화려한 이미지를 벗고 진정한 ‘실력짱’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혜인. 라이벌 아닌 라이벌 간의 재기 넘치는 대화 속엔 순수한 우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2003년 영 위민(Young Women, 만 20세 이하 대표선수)대회 때 태극마크를 달고 처음으로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어봤다는 신혜인과 정미란은 외모서부터 성격, 술 실력, 경력 등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신혜인이 숙명여중·고를 거친 서울 ‘토종’이라면 정미란은 농구 명가로 명성이 자자한 삼천포중·고를 졸업한 지방 ‘용병’ 출신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회에서 ‘맞짱’을 뜬 전력만 놓고 본다면 정미란의 승. 프로팀 입단 전까지 다섯 번 싸워 1패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신혜인(신): 소년체전대회를 앞두고 감독님이 대진표를 추첨하러 갔다 오셨어요. 체전에선 1패만 해도 예선 탈락이었기 때문에 첫 경기가 무엇보다 중요했죠. 그런데 감독님이 선수들한테 이러시는 거예요. “삼천포야!” 설마 최강팀으로 꼽히는 삼천포와 맞붙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농담인 줄 알았으니까요. 시합 전날 잠을 못 잤어요. 지레 겁먹고 벌벌 떨며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싶었죠. 어차피 진 시합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나갔는데 의외로 선전을 하게 됐어요.
신: 그때 삼천포가 결국 결승에 진출했고 우리는 관중석에서 응원을 했는데 삼천포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어디 가서 우승팀한테 졌다고 하면 덜 창피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정: 그러다 고등학교 때 또다시 숙명이랑 붙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숙명한테 지고 말았죠.
신: 이긴 이유가 있었어요. 경기 전 감독님께서 “너희들이 삼천포한테 이기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말씀 하시는 거예요. 순간 열이 확 받았죠. 그게 다 감독님 작전이었을 텐데, 어린 마음에 어떻게 감독이란 분이 ‘잘해보자’라는 말은 고사하고 저렇게 초를 치실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결승전도 아니었는데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쏟아냈죠.
그 덕분에 결국 여고부 전체팀에서 최초로 삼천포를 이기는 영광을 차지하게 됐어요. 경기 종료 30초 전부터 울기 시작했다니까요. 얼마나 기뻤으면 그랬겠어요. 그런데 재밌는 건 삼천포한테 이기려고 너무 애를 쓴 나머지 선수들이 탈진한 바람에 다음날 선일과의 경기에선 폭삭 망하고 말았죠. 그때 우리팀 선수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차라리 어제 질 걸 그랬네.”
정: 더욱 우스운 건 다음 대통령배 대회 때 삼천포 선수들은 숙명한테 진 걸 교훈 삼아 머리까지 싹둑 자르고 심기일전해서 숙명과의 재대결을 벼르고 출전했어요. 그런데 숙명이 예선전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재대결이 성사되지 못했죠. 얼마나 허탈하던지.
신: 아니 우리도 본선 진출해서 삼천포랑 다시 붙으려고 별짓 다했거든요. (‘별짓’을 어떻게 했냐는 물음에) 그건 농구가 아니라 축구였어요. 심판들 안 볼 때 상대 선수를 발로 차고 잡아당기고 밀고, 하여튼 할 수 있는 파울은 다 해봤으니까. 그래도 지는 걸 어떡하냐고요.
술로만 대결을 벌인다면 정미란의 압승으로 끝날 것 같다. 정미란이 ‘필름 끊겨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만큼 ‘말술’이라면 신혜인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기 때문. “술은 아빠(신치용 삼성화재 배구팀 감독)를 닮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 봐도 술과는 큰 인연이 없는 듯했다.
정: 이번 우승 후 뒤풀이 때 제 진가가 발휘됐어요. 폭탄주 5잔에 양주 3병(2명이서 마신 주량)을 마셨는데 하나도 취하지 않더라고요. (‘알딸딸’하지도 않았냐는 물음에) ‘알딸딸’한 기분이 어떤 건지 정말 궁금해요.
신: 야, 너 진짜 대단하다. 하긴 영 위민 대회 때 회식 자리에 미란이가 제 옆에 앉았는데 맥주를 보리차 마시듯 마시더라고요. 전 이번 시즌 끝나고 선배들과의 회식 때 캔 맥주 2개 마시고 소주를 1병 비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그냥 잤거든요.
정: 어제 우승을 축하하신다며 삼천포 코치님이 오셨더랬어요. 저녁에 숙소 앞에서 만났는데 술 한잔 사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숙소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안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코치님이 이러시대요. “야, 너 술 안 취하잖아. 소주 딱 1병만 마시고 들어가라.”
정: 전 ‘뒤처리 전담반’이에요. 워낙 생생하니까 선배들이 저 믿고 그냥 취해버리거든요. 그건 좀 힘들더라고요(정미란은 아직 운전면허가 없다. 삼천포에서 식당하시는 부모님이 ‘차와 술,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고 해서 ‘자신있게’ 술을 택했다가 그 자리에서 맞을 뻔했다고^^).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두 아가씨들한테 그러면 짝사랑은 해봤냐고 질문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다.
신: 실명을 얘기해도 되나? 이번에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프로팀에 입단한 오빠예요. (팀명을 묻자 순진한 신혜인, 조심스럽게 팀명에다 이름까지 밝히고 만다) 음, 전주 KCC의 최승태 오빠 아세요? 아마 그 오빤 제가 팬으로서 좋아하는 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고. 플레이하는 걸 보고 반했어요. 그 다음엔 인간성에 ‘졸도’했고. 너무 멋있어요. 그런데 어느 사석에서 여럿이 만났는데 그 오빠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거예요. 그때 마음 접었죠. 전 임자 있는 사람은 안 건드리거든요.
정: 저도 농구하는 오빠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어요. 연세대 양희종 선수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짝사랑했는데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예요. 진도가 나갈 상황이 아니니까. 아마 그 오빠도 절 팬 정도로만 알고 있을 거예요.
신: 사람들은 제가 남자친구도 많고 연애도 많이 해봤을 거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남자친구가 있던 적이 딱 한 번밖에 없어요. 그것도 운동 때문에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고요. 올 시즌 끝나고 미란이랑 전화통화하면서 ‘남자친구 만들기’를 새로운 목표로 잡았거든요. 지금 스코어상으로 희망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죠.
정: 남자들은 왜 운동선수를 여자로 안 보죠? 그래서 누굴 좋아해도 고백을 못하겠어요.
신: 학교가 강남에 있어서 그랬는지 저와 관련된 소문이 참으로 이상해요. 심하게는 제가 나이트클럽에서 산다는 얘기도 있어요(‘맞지?’ 하며 정미란한테 물어본다). 나이트클럽이란 데를 이번 시즌 끝나고 처음 가봤거든요. 정말이에요. 강남에 있는 애들은 훈련도 대충하는 걸로 알아요. 아마 서울에서 합숙했던 팀은 우리(숙명)밖에 없었을 걸요.
10대와 20대의 가장 큰 차이를 ‘돈’이라고 말하는 두 사람. 용돈을 타 쓰는 학생에서 돈을 버는 사회인이 된 것이 너무나 행복한 현실인 것이다.
신: (정미란한테) 너 이번에 우승 보너스로 얼마나 받니?
정: 아직 모르겠어. 오늘 오후에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돼지꿈 꾸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잤다. 그런데 엄마가 그러시더라. 어린 것이 ‘돈독’이 올랐다고.
사진 촬영을 하면서도 연신 수다를 떠는 두 사람. 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을까 싶었지만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눴다.
앞에 놓인 맥주를 가볍게 마시는 정미란과 냄새를 맡으며 입만 대는 신혜인. 언뜻 보면 ‘된장찌개’와 ‘스테이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이지만 승부에 대한 근성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보였다. 그들이 공통으로 내세운 목표, ‘남자친구 만들기’가 제대로 성공하기 빌면서 훗날 ‘거하게 소주 한잔하자’는 약속을 끝으로 한낮의 ‘맥주토크’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