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 리그를 마치고 귀국한 박지성이 ‘내추럴’한 웨이브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네덜란드에서 후기리그를 마치고 귀국한 박지성(23·에인트호벤)을 지난 26일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퓨전 소주바 ‘주몽’에서 만났다.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에다 약간의 웨이브를 준 헤어스타일이 얼굴보다 먼저 눈에 띌 만큼 박지성의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다른 느낌을 전했다. 말수도 부쩍 늘었다. 줄기차게 단답형의 대답만을 고집했던 것과는 달리 농담과 유머를 적절히 섞어가며 재미난 이야기도 구사할 줄 알았다. 취중토크라서 그런 건가?
술 한 잔에 얼굴이 벌게지는 ‘순진남’이지만 이런저런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하고 사는 신세대이기도 하다. 중국과 태국 요리를 적절히 섞은 맛난 음식을 안주 삼아 일본의 전통술 ‘사케’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솔직히 기자가 주기보단 받은 잔이 더 많다) 박지성의 다양한 ‘추억거리’들을 들어본다.
아무래도 달라진 헤어스타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긴 데다가 정리가 되지 않은 듯한 어수선함으로 인해 미용실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며칠 전에 단골 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가 공들여 해준 머리”라며 머쓱해 한다. 이번 헤어스타일의 컨셉트가 ‘내추럴’이라는 설명까지 붙여가면서. 얘기를 듣고 보니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가 꽤 자연스럽게 보이기는 했다.
귀국 후 며칠 쉬었는데도 여전히 박지성은 휴식에 대한 갈증이 꽤 컸다. 프로 선수가 된 이후 2주 이상 쉬어본 적이 없었고 월드컵 이후에는 더더욱 쉼 없는 시간들이었다.
“너무 많이 놀아서 절로 운동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으면 좋겠어요. 며칠 쉰 것 갖고는 절대 해결되지 않죠. 문제는 저와 같은 ‘백수’가 주위에 별로 없어서 낮엔 같이 놀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대부분 직장을 다니거나 아니면 시즌 중인 축구선수라 만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1. 미팅의 추억 박지성이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99%는 남자다. 형 아니면 친구가 대부분. 그것도 예전에 같이 운동했다가 지금은 사회인으로 돌아선 사람들이다. 남자들끼리 만나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박지성은 오히려 남자들끼리 만나야 더 편하고 즐거워진다고 강변한다. 그 배경엔 현재 여자친구가 없는 ‘절박한’ 사정도 한몫하고 있었다.
▲ 지난해 7월 우리나라에서 열린 피스컵. | ||
박지성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패밀리’ 중에선 박지성의 이성 문제를 위해 ‘해결사’로 나서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으레 그러려니 한다는 것.
2. 댄스의 추억 박지성은 유독 낯을 가리는 성격이다. 웬만큼 친해지지 않고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일요신문>에 박지성의 ‘천방지축 네덜란드 일기’를 1년 넘게 연재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도 박지성의 낯가림으로 인한 소극적인 자기 표현이었다. 그래도 일기가 중반으로 넘어서면서부턴 표현 문장도 길어지고 약간의 유머와 재치있는 어구들이 첨가돼 조금은 쉽게 갈 수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다고 해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고 재롱도 곧잘 부렸다는데 어느날 ‘사고’가 난 이후로 성격 자체가 완전히 변해 버렸어요.”
그 ‘사고’란 이전에 한번 소개된 적이 있었던 나이트클럽에서의 악몽을 말한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무대 위에서 신바람 나게 춤을 춘 것이 인기 폭발이었고 사람들이 저마다 박지성의 손을 잡아당기며 춤을 춰보라고 강요한 것이 천진난만한 어린 박지성한테 악몽과 상처를 주며 끔찍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 사연이다. 박지성은 그 후론 남들 앞에서 춤을 춰본 적이 없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후 아주 가끔씩 친구들 앞에서 감춰둔 실력 발휘를 하는데 박지성의 현란한 댄스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기절 직전에까지 이른다는 것.
3. 슬럼프의 추억 술잔을 받아 든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가늘어서 조금은 놀랐다. 운동선수의 손이 너무 고운 것 같아 잔을 부딪치면서도 시선은 자꾸 손으로 향했다. 뭔가 다르다는 느낌,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에 빠져있는데 박지성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제가 부상으로 한참 헤매고 있을 때 제일 괴로웠던 게 뭔 줄 아세요? 제가 잘 알려진 유명 선수라는 사실이었어요. 만약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면 제가 게임을 잘하는지, 부상을 당했는지, 슬럼프에 빠졌는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경기 결과가 한국으로 전해지고 기사화되고 팬들이 실망하는 이런 피드백이 너무 괴롭더라고요. 귀국해서 이렇게 얼굴 들고 다니려면 시즌 성적이 좋아야하는데 미래가 불투명해 보일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어요.”
4. 술의 추억 술잔에는 손이 자주 갔지만 마시는 양은 극히 적었다. 원래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이라고 한다. 사진기자가 술 마시는 모습을 연신 찍어대자 박지성이 한 마디 한다. “이거 신문에 나오면 ‘박지성이 맨날 술만 마신다’고 하겠네.”
초등학교 3학년 때 소주를 처음 먹어봤단다. 집에 놀러 오신 아버지 친구 분께서 자꾸 마셔보라고 권하는 걸 ‘원샷’으로 들이킨 후 방에 들어가 대자로 뻗었단다. 술을 제대로 마신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학년의 선수들끼리 모여 맥주를 앞에 놓고 ‘한국축구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수차례 건배를 한 뒤론 또다시 기억이 가물가물.
“술이 맛이 없더라고요. 아직 술을 마실 줄 몰라서 그런가? 술자리는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누난 술이 맛있어요?” 잠시 당황했다. 술맛을 모르는 사람에게 진정한 술맛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술이 맛있다고 느낀 부분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할지 난감했던 것.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을 이어가며 화제를 바꿨다.
▲ 지난해 피스컵에서 LA갤럭시의 홍명보와 공다툼. 2002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골 넣은 후 히딩크 감독과 포옹. | ||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믿겨지지 않았어요. 전 19세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올림픽 대표팀이라는 거예요.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었죠. 상비군도, 청소년대표팀에도 뽑힌 적 없는 제가 곧바로 올림픽 멤버로 뛰게 됐으니까요. 대표팀에 합류하니까 모든 게 신기했어요. 유니폼도, 축구화도 엄청 많이 주는 거예요. 그것도 나이키로. 처음엔 ‘왜 이렇게 많이 준다지?’하며 의아해할 정도였죠.”
박지성은 당시 박진섭과 한방을 썼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박진섭은 ‘허정무의 황태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터라 ‘연습생’ 박지성으로선 박진섭의 존재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월드컵 대표팀에선 TV로만 봐온 홍명보가 제일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홍명보와 함께 첫 훈련을 하는데 너무나 완벽한 플레이를 선보여 감탄으로 시작해서 감탄으로 끝이 났다고.
6. CF의 추억 월드컵대표팀에 이어 현 에인트호벤에서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히딩크 감독에 대한 소회가 궁금했다. 또 대표팀 때랑 리그에서랑 히딩크 감독의 차이점도 덩달아 알고 싶었다. “네덜란드 선수들도 가끔 저한테 물어봐요. 히딩크 감독이 한국에서는 어떻게 했냐고. 훈련 방법은 똑같아요.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요. 히딩크 감독과 인연이 깊은 건 사실이죠. 그렇다고 해서 절 특별히 예뻐하거나 챙겨주는 일은 절대 없어요. CF에서의 포옹신은 100% 연기이지 감정 표현이 아니니까요.”
지난해 한국에서 피스컵대회가 열렸을 때 에인트호벤팀이 참가한 적이 있었다. 물론 박지성과 이영표도 PSV의 유니폼을 입고 한국에 들어왔다. 어느날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 벌어진 에피소드다. 선수, 코칭스태프, 구단 관계자들이 모두 식당에 모여 저녁을 먹으려는 찰라, 박지성의 귀에 아주 익숙한 CF의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더라고. 순간 모든 선수들이 일제히 “우와!”하며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등 소동이 벌어졌고 조용하던 홀이 갑자기 시장 바닥으로 변했다. 그 가운데 자리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하는 사람은 히딩크 감독과 박지성밖에 없었다고.
박지성의 색다른 점은 어느 선수보다도 솔직한 표현을 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뷰 말미에 새로 선임될 대표팀 감독에 대해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묻자 거침없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요. 누구한테 간섭받거나 휘둘림을 당하지 않고 소신대로 밀고나가시는 분이었으면 해요. 투쟁을 해서라도 말이죠. 불가능을 미리 염려하기보단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고집스럽게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는 분과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길 바라요.”
연신 휴대폰이 울려댔다. 어둠이 깔리자 비로소 ‘백수’의 활동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이젠 그를 풀어줘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