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11일 일산의 한 카페. 산뜻함이 물씬 풍기는 블루 컬러의 와이셔츠를 입고 나타난 박 감독대행은 베트남전에서 보였던 딱딱한 표정을 풀고 한결 부드럽고 여유있는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취중토크’라는 걸 알고 ‘크리스천이라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술잔을 거부하길래 ‘기자도 같은 종교이지만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신께 용서를 구하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떨고는 건배를 외쳤다. 결국 연출용 사진만을 위해 잔을 부딪친 박 감독대행은 술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라는 양심 고백을 곁들이며 ‘감독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짧은 경험을 차분하게 털어 놓았다. 쿠엘류 감독과의 불화설 진원지로 내몰리며 어정쩡한 대표팀 감독대행으로 네 경기를 치른 소회, 그리고 월드컵대표팀 감독직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에 대한 박 감독대행의 ‘리얼 토크’를 소개한다.
솔직히 박성화 감독대행을 만나러 가면서 걱정이 앞섰다. 경기장에서 보이는 이미지가 워낙 ‘말수 적음’으로 대변되었던 터라 제대로 속내를 끄집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 그러나 그와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기자의 우려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선 질문할 틈이 없었다. 한 가지 물음표를 던지면 20∼30분씩 이상 강의식 답변으로 임해 ‘취중토크’라기보다는 진지한 교수 앞에 앉아 있는 ‘날라리’ 학생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화술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되새김질 해보면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
먼저 최근 박 감독대행을 가장 힘들고 괴롭게 했던 쿠엘류 감독과의 불화설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마치 외국인 감독을 쫓아 보낸 ‘당사자’로 지목된 일부 여론 또한 여전히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부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전 대표팀에서 감독이 아닌 수석코치였어요. 코치는 감독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구조에서 어떻게 제가 감독을 내몰 수가 있겠어요? 오히려 쿠엘류 감독이 절 배제시킨 적은 있어도 제가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거나 어기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유럽에서 뛰는 스타플레이어들은 훈련을 느슨하게 해도 본게임에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쿠엘류 감독의 지도방식이 먹혀 들어갑니다. 축구를 배우는 성장과정이 우리나라와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선수들한테는 다소 느슨하고 자유로운 지도 스타일이 시기상조예요. 풀어줄 땐 풀어주더라도 압박할 때는 강하게 압박해야 하는데 쿠엘류 감독은 그런 부분에서 선수를 너무 믿으셨던 것 같아요.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박 감독대행은 대표팀 수석코치를 지내며 자꾸 히딩크 감독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영리한 사람인지를 새삼 절감했다는 것. 한국의 축구문화와 선수들의 훈련 태도, 주위의 다양한 소리들을 연구하고 분석한 뒤 감독 중심의 코칭스태프 분업화와 시기적절한 자극 요소들을 끊임없이 내놓으면서 선수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쿠엘류 감독은 의심이 많았어요. 한국인 코치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코치와 선수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 궁금해 했고 그 궁금증을 참지 못했어요.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하지만 감독이라면 그런 건 감수해야 했어요. 서로 잘 해보자고 모인 사람들이 뒤에서 감독 흉이나 보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큐엘류 감독은 사사건건 신경을 썼고 선수단 미팅 때도 코치들은 입도 뻥긋 못하게 했습니다.”
지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한·일전 때의 해프닝 한 가지. 전반전에서 시종일관 답답한 경기를 펼쳤던 선수들이 라커룸에 들어서자 박 감독대행은 쿠엘류 감독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선수들을 다시 앉혀 놓고 ‘공수의 폭이 너무 넓어 협력 수비가 안된다’면서 좀 더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플레이를 강조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 그는 쿠엘류 감독의 호출을 받았다. 이유인즉슨 감독이 있는데 코치가 나서서 이야기하면 팀워크에 차질을 빚을 수 있으니 앞으로 자신의 허락 없인 선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말 황당했어요. 제가 무슨 나무토막도 아니고 명색이 수석코치인데 감독 허락 없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니 순간적으로 화가 났었죠. 그러나 곧 감독의 말을 이해했어요. 제가 자꾸 나서면 선수들이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저한테 의지할 수 있으니까 감독의 권위가 떨어질 수도 있겠죠. 그 다음부터는 아예 입을 닫고 살았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전을 유심히 살펴보면 박 감독대행이 경기 내내 미동도 하지 않고 벤치에만 꼼짝 않고 앉아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름대로의 항의 표시였고 또 나름대로 감독 명령에 충실(?)하려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 코치를 ‘동업자’가 아닌 ‘훼방꾼’으로 인식하는 듯한 쿠엘류 감독의 처사에 감정이 상했던 그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여러 차례의 경기를 치르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고 감독과 코치 사이의 이전의 긴장감도 한층 누그러트릴 수 있었다.
“쿠엘류 감독이 비로소 한국 축구문화의 특수성을 깨닫고 이해할 만했는데 떠나시더라고요. 당시 이런저런 TV 프로그램에서 쿠엘류 감독과 코치들과의 불화설에 대해 방송을 내보내며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요. 그래도 응하지 않았던 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탓하기 전에 어차피 이런 결과를 빚게 된 것은 감독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코치들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서질 않았던 겁니다.”
박 감독대행은 갑작스런 쿠엘류 감독의 사퇴로 인해 어정쩡한 모양새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코치 입장에선 감독직 자리가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고 토로한다.
“만약 쿠엘류 감독이 좋은 모습으로 물러났다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킨 채 사퇴했다면 코치도 자동 사퇴하는 겁니다. 수십 번도 더 물러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수선한 이런 상황에서 저까지 사퇴 운운할 경우 괜히 더 시끄러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차기 감독이 올 때까지만’이라고 못박고 계속 대표팀에 남아있었던 겁니다.”
▲ 안정환, 박지성, 최진철 (왼쪽부터) | ||
“항간에선 제가 감독직에 욕심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물론 지도자 생활을 하는 사람치고 국가대표팀 감독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것도 아시안컵이나 월드컵을 앞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죠.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아닙니다. 제 자리도 아니고요. 욕심을 앞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죠.”
메추 감독이 차기 감독으로 부임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터키와의 평가전을 위해 대표팀을 소집했던 그는 순간적으로 앞이 막막했다고 한다. 설칠 수도, 나설 수도 없는 답답한 분위기에서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독려하기란 어떤 일보다도 어려운 ‘숙제’로 다가왔다는 설명이다.
“선수단 미팅 때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조용히 준비하자. 내 입장을 너희들이 십분 이해한다면 어느 때보다도 집중력있는 훈련 태도로 좋은 결과를 얻어내도록 노력하자’는 말을 꺼냈는데 선수들이 잘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터키와의 2차전은 제가 생각해도 우리 선수들이 너무 열심히 뛰어줬거든요. 더 이상 자멸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도 한몫했겠지만 ‘어정쩡한 감독이자 선배’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준 선수들한테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요. 그 경기 후에는 표정관리 하기가 어려울 만큼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숨 돌릴 틈 없는 박 감독대행의 말을 경청하다가 잠시 숨 고르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오프 더 레코드를 몇 차례 부탁했는데 그가 처한 애매모호한 위치와 현실을 절감하게끔 해주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시기에 한배를 탄 선수들에 대한 짧은 소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평가를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우선 (안)정환이는 처음 대표팀에서 만났을 때 깜짝 놀랄 정도로 체력이 업그레이드 돼 있더라고요.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하며 좋은 쪽으로 많은 변화를 이뤘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이)영표와 (박)지성이는 가장 믿음직스런 친구들이에요.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몫을 충분히 소화해 낼 만한 실력과 체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감독이라면 영표와 지성이 같은 타입의 선수를 좋아할 수밖에 없죠. (김)태영이와 (최)진철이는 정말 부지런해요. 2006독일월드컵에서 뛰고 싶어하는 욕심이 장난 아닙니다. 그런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자기 관리가 무섭도록 철저한 것 같아요.”
만약 기술위원회가 발표하기로 한 27일까지 차기 감독이 정해지지 않을 경우 계속해서 대표팀 벤치에 앉아있을 것인지를 물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요. 협회에서 외국인 감독을 인선하겠다고 했으니 제가 다른 생각할 이유가 없잖아요. 27일까지 기다려봐야죠.”
박 감독대행의 애매하고 예민한 위치를 훤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짓궂게 속내를 떠보기 위한 질문을 계속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새 감독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자료를 넘겨줄 자세가 되어 있다고 강조하는 바람에 더 이상의 매달림이 무의미해 보였다.
그동안 힘은 들었지만 ‘돈 주고도 못할 중요한 경험’을 했다는 박 감독대행은 어느새 그의 ‘친정’인 청소년대표팀 감독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