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 속 남자 하나, 여자 둘을 찾아라!…과거와 ‘무전’ 시작됐다
“여러분이 경찰의 시그널이 되어 주세요.”
지난 2월 25일, 부산경찰청 장기미제수사팀이 공식 SNS에 10장의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이다. 간략한 사건 개요와 용의자들의 사진이었다. 미제사건팀이 직접 공개수사에 나선 것이다. SNS를 통해 공개수배를 시작한 곳은 지난해 경찰청의 ‘장기미제사건전담팀 정식 편성’ 발표 이후 구성된 전국 미제사건팀 가운데 최초다. 누리꾼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게시물은 공개된 지 이틀 만에 ‘좋아요’가 4만 건을 기록했고, 누리꾼 나름의 추리를 덧붙인 공유는 1600건을 넘어섰다.
부산지방경찰청 전경.
사라진 여성은 부산 괘법동 한 다방 종업원 A 씨(당시 22세)였다. 당시 수사 기록을 보면, A 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검소하며 성실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언제나 환하게 웃고 붙임성도 좋으며 일도 열심히 한다는 증언이었다. A 씨가 일하던 가게의 업주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해서 다른 종업원들보다 월급을 더 주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A 씨가 자취를 감춘 2002년 5월 21일도 여느 때와 같이 밝은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이날 밤 10시께 퇴근했다 다시 가게로 돌아와 평소 취미로 하던 “종이접기를 두고 갔다”며 멋쩍게 웃었던, 사소한 일뿐이었다.
다방을 나선 A 씨는 같은 날 밤 11시께, 임시로 자신의 자취방에 머물던 후배와 통화를 했다. A 씨의 집에 가방을 맡겨뒀던 후배는 “지금 지인들과 경주 축제장에 와 있으니 내일 아침에 가방을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이어 “퇴근 잘했냐”며 “지금 어디까지 왔느냐”고 묻는 후배의 말에, 시끄러운 주변 소리 틈에 섞여 “서면이다”라는 A 씨의 대답이 전해졌다. 그가 사라진 것은 이 통화를 한 이후다.
A 씨의 실종을 가장 먼저 알았던 것은 인근에 살던 친언니였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했던 A 씨에게 종종 반찬도 전하고, 청소도 해주며 돌봐주던 친언니는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다만 이 시기엔 친언니가 임신 중이라 방문이 뜸했다고 한다.
동생이 며칠째 전화도 받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친언니는 직접 집을 찾았다. 집은 잠겨있었고 어디론가 떠난 흔적도 없었다. A 씨의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한 끝에 그가 일하던 다방을 찾아 갔으나, 다방에서는 오히려 언니에게 “A 씨가 연락도 안 되고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며 행방을 되물었다. 다방을 나선 친언니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2002년 5월 31일, A 씨가 사라진 지 열흘 뒤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부산 강서구 명지동 성창목재 뒤편 바닷가에서 A 씨가 발견됐다. 인근을 지나던 공공근로자가 파도에 떠밀려 온 구멍 난 마대자루에서 신체의 일부를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발견 당시 A 씨는 검은색 비닐봉투 6겹, 마대자루 2겹에 포장하듯 싸여 있었다. 옷은 그대로 입고 있는 등 성폭행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약 40여 곳에서 흉기로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당시 국과수 부검 결과 40여 곳 중 2~3곳만 치명상이었고, 나머지 상처는 모두 ‘위협 손상’으로 분석됐다. 범인이 흉기 끝으로 A 씨를 찌르며 수십 차례 위협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지만, 범행 현장, 또는 구체적인 유기 장소 등은 특정하기 어려웠다. 단지 A 씨가 서낙동강 인근에서 떠내려 왔을 경우, 또는 을숙대교 방향에서 조류로 인해 밀려 왔을 경우 등 추정만 할 수 있었다. 또한 A 씨를 이처럼 참혹하게 살해할 만한 용의자를 찾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늘 밝고 성실했던 A 씨는 동료나 손님, 또는 지인들과 별다른 갈등이 없었고, 특별한 원한 관계를 가질 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로 A 씨의 집에 머물던 후배에게서 실종 당일 A 씨가 “퇴근 후 서면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다”는 증언을 확보했지만, 이날 그와 연락을 나눈 흔적은 없었다. 특히 A 씨가 퇴근한 시간 이전에 자신의 집으로 갔던 점이 확인돼, 결국 용의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다만 경찰 수사 과정에서 A 씨의 일부 동료들을 통해 범행 동기로 추정되는 증언을 확보했다. 동료들 진술에 따르면 A 씨는 귀중품을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것이다. 통장과 도장, 신분증 등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여기에 A 씨가 종종 “저축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진술도 이어졌다. 부산지방경찰청 지영환 미제사건전담수사팀 팀장은 “당시 수사 기록을 보면 A 씨가 한 달에 100만 원이 넘게 저축을 하는 등, 꾸미지도 않고 늘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저축을 해온 사람이었다고 한다”며 “A 씨를 수십 차례 위협했던 흔적이 발견된 점으로 볼 때,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수사팀도 금품을 노린 범행 또는 A 씨의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A 씨가 실종된 다음날인 2002년 5월 22일, 한 남성이 A 씨의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장면이 은행 CCTV에 포착됐던 것.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한 남성이 A 씨가 일하던 다방 인근 은행에서 태연하게 돈을 빼낸 것이다. 또한 대범하게도 경찰 수사가 시작된 이후 또 다른 용의자인 여성 2명이 돈을 인출했다. 이번엔 다방과 멀리 떨어진 부산 북구의 한 은행이었다.
용의자 ‘갑’은 20대 중반의 건장한 체격으로 붉은색 뉴욕양키스 모자, 흰색 긴팔 티셔츠, 곤색 트레이닝 바지, 조리 슬리퍼를 착용했다.
하지만 이번엔 이들의 신원이 특정되지 않았다. A 씨의 주변인물도 아니었으며, 이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지인도 나오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흉기로 위협하고 범행을 감추기 위해 비닐봉지, 마대자루 등으로 사체를 감싼 것으로 볼 때 전과자의 소행으로도 의심이 돼 동종 전과자를 상대로 수사를 벌였지만, 여기서도 용의자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용의자들에 대해 현상금을 걸고 수배 전단지를 배포하며, 한 공개수배 방송에서 사건을 방영하기도 했지만 결국 A 씨 사건은 미제로 남게됐다.
용의자 ‘을’은 30대 초반, 뚱뚱한 체격으로 키 160cm, 몸무게 75kg가량, 단발머리에 검정색 긴 원피스를 착용했다.
용의자 ‘병’은 20대 후반, 보통 체격으로 키 160cm, 긴 파마머리에 검정색 원피스와 짙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착용했다.
부산지방경찰청 장기미제사건수사팀은 수사 기록을 넘겨받은 이후 전면 재검토 과정을 거치고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세워 수사에 착수했다. 앞서의 지영환 미제사건팀장은 “수사 기록을 보면 당시 할 수 있는 수사는 거의 다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빠진 것이 없나 꼼꼼하게 보고 있다”며 “14년 전보다 수사 기법이 발달해 당시에는 할 수 없었던 수사 방법들도 동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개수사에 나선 것은 용의자들이 성인이라 시간이 지났어도 얼굴이 크게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며 “작은 단서라도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시민들의 제보는 사건 해결을 위한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다”라고 말했다. 이어 “범인들도 오랜 시간 동안 죄책감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 등 심적으로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수하면 일부 선처 받을 수 있는 조항도 있으니 피해자에게 사과도 하고 또 다른 삶을 이어갔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제보전화는 부산지방경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 (051) 899-2570, 3182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과거에 못다 푼 ‘퍼즐’, 현재의 기술로 역추적”…부산 미제팀 인터뷰 “피해자 가족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 아직도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사건에 대한 관심을 가져준 것 자체가 너무나도 고맙다고.” 최근 지영환 미제사건팀장이 형사들과 함께한 미제사건 피해자 가족을 만나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지 팀장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가족을 잃어도 슬픈데, 영문도 알 수 없이 가족을 잃으면 그 상처가 얼마나 크겠나. 그들의 상처를 빨리 풀어 주는 것, 그것이 미제팀의 존재 이유다”라고 말했다. 부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은 지난해 형사소송법에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 조항’이 신설된 직후 정식 부서로 편성됐다. 전국 지방청 중에서 가장 빨랐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한시적 활동’이나, ‘보여주기 식 편성’이 아니다. 정식 발령을 통해 팀이 구성됐으며, 부산청에 남아있는 26건의 미제사건이 모두 해결되더라도 미제사건팀은 영구적으로 존속된다. 미제팀 형사들은 수사 경력, 성적 등 심사위원회의 엄격한 평가와 심사를 거쳐 최종 선발됐다. 타 부서에 남아 일반 사건을 해결해 나가며 차근차근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길을 기꺼이 포기했다. 지 팀장은 “일부는 미제사건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등, 수사 노하우가 쌓여 있는 우수한 형사들이다. 의지와 열정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미제사건팀은 사건 발생 5년 동안 풀지 못한 ‘퍼즐’을 가져와 맡는다. 당시 사건을 역추적해 재구성하는 게 주된 작업이다.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는 점, 턱없이 부족한 단서에 주변인 기억도 희미해진 상황은 일반 범죄 사건과 크게 다르다. 미제 사건이 장기로 흘러갈수록 해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지 팀장은 “하얀 바탕에 퍼즐 조각을 하나 하나 맞춰가며 큰 그림을 완성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퍼즐 조각을 찾는 것부터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한 사건이 미제로 남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증거부족’인데, 과거에도 찾지 못한 증거를 십수 년이 지난 뒤 다시 찾기란 쉽지 않다. CCTV나 목격자도 없고, 유전자 감식 기법이 발달하지 않아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워 미제로 남은 사건을 역추적해야 한다. 이 때문에 부산청 미제팀은 새로운 증거 또는 단서를 확보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시 사건 현장을 찾아 분석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러 군데 흩어져 있거나 사건 발생 당시 놓쳤던 단서들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인, 참고인 등을 한 명씩 찾아 함께 과거로 돌아간다. 지 팀장은 “예전 사건이라도 생각하다 보면 기억이 나지 않던 사안이 갑자기 기억나는 경우가 있다. 묻어둔 기억을 다시 꺼내기 위해 수사팀이 현장을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부산지방경찰청 미제사건전담팀에 보관돼 있는 26건의 미제사건 수사 기록 중 일부. 지 팀장은 “과거보다 발달한 과학수사 기법도 새로운 증거, 놓친 단서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미 국과수에 재감정 중인 증거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한 단계씩 올라 가다 보면 마지막 꼭짓점에 이르러 결국 범행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여러 군데 흩어진 단서를 찾는 데 시민들의 제보가 결정적일 수 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