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로 피가 마른다
▲ 지난 7일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강연하는 이명박 전 시장. 오른쪽은 박근혜 전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 전 시장의 경우 감기로 잠시 강연을 접기 전까지만 해도 지난 11월 21일 한양대 강연을 시작으로 22일 포천지역 3개 대학 강연, 23일 전북 군산대 강연과 전주 월드컵컨벤션 강연, 27일 부산 고3 수험생 대상 강연, 28일 마산시의회 강연, 29일 한양 세종 사이버대 총학생회 강연 등을 이어갔다.
12월 1일 4박5일간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박 전 대표는 그동안의 빈틈을 메우기라도 하듯 5일 대구 계명대와 경북대에서 강연을 하더니 6일 목원대와 충남대를 찾았고 8일에는 중앙대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언론 노출에는 아직 적극적이지 않지만 이처럼 강연을 빌어 물밑에서 펼쳐지는 대중 접촉은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과 비슷하다. 이들의 강연을 귀담아 들어보면 기본적 정책대결은 물론 상대방을 의식한 묘한 발언도 간간이 흘러나온다. 이들의 강연 현장에는 선관위에서 나온 사람이 사전선거운동은 아닌지 눈빛을 빛내기도 한다.
지지도 1, 2위를 다투고 있는 두 대권후보의 강연정치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지난 7일 저녁 7시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강연장. 건국대 부동산 대학원의 주최로 열린 부동산정책 강연회에 이명박 전 시장이 강연자로 나섰다. 감기로 잠시 중단했던 강연을 새로 시작한 참이었다. 한 시간 넘는 강연 도중 이 전 시장이 가장 중점적으로 얘기한 부분은 바로 ‘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이 전 시장은 서두에서 “부동산 문제가 전 국민적 화두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오늘은 이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며 정치적 발언을 삼가려는 듯했지만 역시 강연이 진행되자 이 문제를 그대로 지나치지는 않았다. 이 전 시장은 또 청계천 사업, 서울시 지하철 노조파업 대응책, 노숙자 문제 해결사업 등 시장 재임 시절 추진했던 사업의 실례를 들어가며 ‘경험에 의한 정책’을 펴나갈 것을 강조했다.
박근혜 전 대표 또한 중국방문 후 강연에 부쩍 열을 올리며 자신의 정책을 설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지난 5일 대구 계명대와 6일 대전 목원대 특강에서 박 전 대표는 근래 주목받은 ‘열차 페리’ ‘U자형 국토개발’ 계획의 필요성을 연이어 강조했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열차 페리를 이용하면 짐 한번 싣고 열차에 앉아 유럽까지 배낭여행을 갈 수 있다”면서 “30분이면 기차가 배에 들어간다”며 실효성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이 전 시장의 ‘대운하 정책’을 의식한 설명이다. 이런 가운데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이 전 시장은 최근 강연에서 ‘대운하 정책’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 관계자는 “한반도 운하로 정책면에서 먼저 주목받은 이 전 시장 입장에선 최근 한반도 운하와 열차페리가 두 후보의 대표적 정책으로 비교 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두 대권후보의 강연에는 현재의 국민적 관심 사안이 대거 포함돼 있을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대권후보로서의 1차적 공약이나 비전을 비교할 수 있는 장이 되고 있는 것. 저마다 국가 비전과 민생 교육 부동산 등 정책 현안에 대해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전 시장이 7일 건국대 특강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해 언급하기 전 박 전 대표 또한 6일 충남대 행정대학원 및 통일문제연구소 초청 특강에서 같은 사안인 부동산 문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박 전 대표는 “민간 간섭을 줄이고 규제도 많이 풀어야 하며 감세 정책으로 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즉 부동산 또한 공급을 늘리고 세금을 줄여 거래를 늘려야 한다는 설명이다. 박 전 대표는 “500조 넘는 부동자금이 갈 곳이 없어 부동산으로 몰려 부동산 시장을 왜곡시킨다”고 덧붙였다.
원론적 주제인 탓에 다음날 건국대에서 강연한 이 전 시장의 의견도 전체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전 시장은 “수요 억제만 하는 것은 무주택자들에게 피해가 전가된다”며 “서민들에게 조세정책은 너무 과격해 군사정책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동산 문제가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인지 이 전 시장은 여기에 신혼부부들을 위한 ‘1인1주택’ 공급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들고 나와 박 전 대표의 일반적 정책에서 한발 더 나갔다. 조용한 가운데 정책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을 꿈꾸는 이들답게 두 대권후보의 언변도 빛을 발하고 있다. 대중들 앞의 강연에서 두 사람의 말재간은 방송에서보다 더 화려하고 재치가 넘쳤다. 특히 청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적재적소의 유머는 화면에서 보던 거리감 있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교묘히 현 정부를 질타하거나 상대후보를 겨냥한 발언도 간간이 내놓았다.
이명박 전 시장은 지난 7일 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잠시 털어놓았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 대통령과 종로지역에 함께 출마했다가 압도적인 표 차로 이긴 적이 있다”고 운을 뗀 이 전 시장은 “당시 압도적인 표 차로 3등을 했던 분이 결국 대통령이 됐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여기에 방점을 찍은 마지막 멘트. “‘그런데 보니까 역시 3등은 3등이구나’라고 느꼈다.”
지방대학의 학생부족 사태를 언급하면서도 이 전 시장은 재치 있는 농담을 내놓았다. “지방대학 교수님들이 신입생을 유치하려고 고등학교에 선물 들고 찾아간다더라. 그래서 지방 고등학교 문 앞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한다. ‘잡상인과 교수 출입금지’.”
이 전 시장은 “최근 독감으로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건강은 괜찮느냐”는 질문에 다소 ‘의미심장한’ 농담을 내놓기도 했다. “건강은 ‘황제테니스’를 할 정도니까 뭐, 걱정 안하셔도 된다.” “또 오세훈 서울시장과 본인 중 누가 더 잘 생겼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그건 잘 모르겠고 KBS <야망의 세월>에 나온 유인촌 씨가 <영웅시대>에 나온 유동근 씨보다 잘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는 대답으로 좌중의 웃음을 끌어내기도 했다(유인촌과 유동근은 두 드라마에서 각각 이명박 전 시장 역을 연기한 바 있다). 이 전 시장은 얼마 전 또 다른 강연장에서는 “유인촌 씨보다는 제가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라는 농담을 한 적도 있었다. 유인촌과 친분이 두터운 이 전 시장은 종종 자신의 외모를 유인촌과 빗대어 농담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박근혜 전 대표의 말솜씨도 그에 못지않다. 전자공학과 출신답게 ‘IT분야’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고 있는 박 전 대표는 인터넷 미니홈피를 직접 관리할 정도로 컴퓨터와 인터넷 활용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박 전 대표는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용어도 많이 알고 있다고 한다.
지난 5일 계명대 특강에서 “제 미니홈피에 1촌이나 1촌 대기자가 있느냐”고 물었던 박 전 대표는 “싸이질하면서 눈팅만 하는 사람은 싫어요”라며 ‘올드 세대’들은 얼른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미니홈피를 통해 젊은 세대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박 전 대표는 대학 강연에서 이 점을 십분 활용했다. 강연장에 있던 이들 중 미니홈피 1촌들에게 “이분들하고 이따 사진 찍겠다”며 웃음을 이끌어낸 그는 “게시판이나 방명록에 글을 남기셨거나 일촌 평 쓴 사람들과는 팔짱 끼고 사진 찍겠다”며 좌중을 한 번 더 웃겼다.
박 전 대표 역시 현 정부에 대한 뼈 있는 질타를 빼놓지 않았다. “야당 대표로서 자기 철학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며 당 대표 시절의 고충을 설명하던 그는 “야당 정책이라는 것은 노래방의 노래”라고 빗대기도 했다. “정책 내놓으라고 해서 내놓으면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는다. 노래방에 가면 한국 사람들은 노래 부르라고 협박까지 해서 노래하면 아무도 안 듣는다. 전부 자기끼리 얘기하고. 야당이 내놓는 것은 그렇게 찬밥신세”라는 것이 박 전 대표의 설명.
한편 양 측의 강연장 분위기도 색깔이 다르다. 박 전 대표의 강연장은 조용한 그의 성격답게 사뭇 진지하고 다소 숙연한 분위기. ‘온화한 미소’가 트레이드마크인 박 전 대표의 주변은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강연장을 찾은 일반인들의 성향 또한 열광적이기보다는 조용한 편이다.
반면 근래 이명박 전 시장의 강연장은 분위기가 다소 들떠 있다. 최근 이 전 시장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인 듯 이 전 시장 주변에는 ‘열성팬’이나 ‘측근’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이 전 시장은 강연이 끝난 뒤에도 기념사진을 찍느라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열혈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은 이 전 시장에겐 안티팬들도 상대적으로 많아 눈길을 끈다. 심지어 강연장에까지 간혹 안티팬이 찾아와 농성을 벌일 정도. 지난 7일엔 이 전 시장의 시장 재임 시절의 정책으로 억울함을 당했다는 한 서울시민이 건국대 강연장에 나타나 현장을 소란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한나라당 빅2의 이러한 강연 정치는 대중과의 접촉을 늘리고 정책의 일단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대권주자들로서는 주요한 일정이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에만 집착해 인기 발언만을 쏟아내는 식이 된다면 오히려 역효과도 우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