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탁 판단 애매해” 일부 의원실 민원 원천차단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김영란법 ‘부정청탁’ 해석에 어려움을 호소하며 지역민들 민원 받기를 꺼리고 있다. 사진은 국회 의원회관 전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권익위 사람들이 김영란법을 더 몰랐다. 참다못해 나와 버렸다.”
9월 6일 기자와 만난 더민주 보좌관의 말이다. 그는 “강의를 하면서도 우왕좌왕해서 화가 났다. 질문을 하면 알려준다고 해놓고 강의 중간에 또 아니라고 하고… 분위기가 안 좋았다”고 설명했다. 다른 보좌관 역시 “알려주러 온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니까 우리도 헷갈렸다. 법안 시행이 얼마나 남았다고…”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9월 1일 권익위는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야당 보좌진들을 상대로 ‘김영란법 부패 방지 교육’을 했다. 더민주 보좌진 협의회가 국민권익위에 요청해 마련한 행사였다. 권익위는 보좌진들에게 ‘김영란법 팁’ 등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권익위 공무원들의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된 순간 곳곳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제5조의 해석을 두고 권익위와 보좌진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동법 제5조 제1항은 “누구든지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공직자 등에게 부정청탁을 해서는 아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어 제1항은 인·허가 등 14가지 부패 빈발 분야의 부정청탁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문제는 “선출직 공직자 등이 공익적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민원을 전달하는 행위”는 부정청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제2항이다. 국회의원은 ‘선출직 공직자’에 포함된다. 하지만 지금껏 국회로 들어오는 민원의 대부분은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처리해왔다. 보좌진들이 ‘공익적 목적’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까닭이다.
당시 교육을 받았던 또 다른 보좌관은 “우리 보좌진도 국민들의 민원을 받을 경우에 제3자의 부탁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국회에서 매일같이 민원을 직접 듣는다. 그런데 ‘부정청탁 여부를 어떻게 구분하냐’고 권익위 공무원들에게 물어보니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바로바로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고 질문을 했는데…”고 전했다.
실제로 김영란법 해설집에는 ‘국회의원’ 관련 규정은 있지만 보좌진의 대응 매뉴얼은 찾아볼 수 없다. 해설집은 “국회의원이 해당 지역구의 고충민원을 듣고 처리하는 것은 정당한 의정활동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권익위 관계자는 “의원은 제3자의 고충민원을 받아서 관계기관에 전달할 수 있다. 보좌관도 마찬가지다. 의원의 보좌관이 대신 민원을 받아서 의원에게 보고한 뒤 기관에 전달할 수 있다. 다만 공익을 위한 민원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현재 일부 의원실은 부정청탁 여부와 관계없이 민원들을 ‘원천차단’하고 있다. 보좌진들이 민원의 ‘공익성’ 여부를 판단하기를 주저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서는 “애매한 기준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민원은 되고 다른 민원은 안 되고가 확실하지 않다. ‘이럴 바에야 민원을 아예 받지 말자’는 방침을 정한 의원실이 많다. 민원을 단순히 받아 전달을 했을 뿐인데 부정청탁 낙인이 찍히면 정말 황당할 수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의원의 지역 사무실 분위기도 뒤숭숭하다. 새누리당의 한 비서는 “보통 ‘민원의 날’ 행사로 지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왔다. 격주로 하는데 보통 하루 20건에 가까운 민원이 들어오곤 한다. 김영란법 시행이 다가오면서 이 행사를 계속 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안 할 수 없다고 판단해 계속 진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전혀 감이 오지 않아 답답하다”고 설명했다.
보좌진들 사이에선 민원 처리 ‘형식’에 대해서도 엇갈리는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또 다른 정책비서는 “민원을 받을 때마다 권익위로 일일이 다 문의를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권익위도 속이 터지겠지만 우리도 전화를 안 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이제는 막상 민원을 받아도 전부 공문으로 해야 한다. 예전에 구두로 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이젠 다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절차도 복잡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법은 지켜야 한다”고 보탰다. 권익위 관계자는 “반드시 문서로 민원 처리를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서로 하면 확실하긴 할 것이다”고 해명했다.
앞서 야당 보좌관들이 참여한 ‘김영란법 부패 방지 교육’에선 작은 소동도 벌어졌다. 이날 강의에서 국민권익위 공무원들은 “국회 보좌진들이 부정청탁을 받았을 경우 거절의사를 밝히거나 신고할 의무가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란법 제7조 제1항은 “공직자 등이 부정청탁을 받았을 때 부정청탁을 한 자에게 부정청탁임을 알리고 이를 거절하는 의사를 명확히 표시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법 제2항은 “공직자 등은 제1항에 따른 조치를 했는데도 동일한 부정청탁을 다시 받은 경우에 소속기관장에게 서면으로 신고하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자리에 참석한 한 보좌관은 “보통 사익과 관련된 민원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하고 그 자리에서 거절하거나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앞으로 민원을 받았을 때 부정 청탁 느낌이 들면 상대방에게 바로 거절의사를 고지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나. 부정청탁의 개념도 애매하지만 어떻게 보좌진이 지역민들에게 부정청탁이라고 하면서 거절할 수 있나. 아무리 잘못된 민원이라도 ‘당신, 부정청탁이다’고 못 박을 수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권익위 관계자는 “민원을 받을 때 얘기를 들어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본인이 판단한 뒤 거절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의 민원 중에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불편을 느끼면 그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민원이다. 하지만 기업인이 와서 특혜성 민원을 제기를 하는 것은 안 된다. 내용을 들어보면 파악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