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수원대 교수] | ||
김지하의 ‘短詩 둘’ 중에서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면 일상으로부터 떠날까, 그래도 “산은 산”이라고 일상을 견딜까? 달은 마음이나 지혜의 은유일 텐데, 이상하다. “내 가난한 가슴에 보름달이 들어”를 발음할 때 부드럽고 따뜻해졌다기보다는 뭔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지만 분명히 잃어버린 어떤 중요한 것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허전해졌고 쓸쓸해졌다.
거기서 보름달처럼 차 오른 것은 슬픔이었다. 사람이 보지 않아도 쉼 없이 물을 채우는 맑은 우물물 같은 슬픔이 저릿저릿 차 올랐다. 문득 마음 속에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낯선 길을 떠나고 싶었고 정처없이 헤매고 싶었다. 급하게 짐을 꾸려 무작정 떠났다. 해질녘이었다. 서쪽 하늘에서 축복처럼 쏟아지는 노을은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그 노을은 견딜 수 없는 거였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그 시간, 하늘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슨 일로 우리를 유혹하기에 이토록 견디기 힘든가. 나는, 우리는 무엇을 견딜 수 없어하고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떠난다.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무엇을 피해 그렇게 집을 떠나고 도심을 떠나는 것일까? 왜,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하는 시인의 마음에 마음을 싣는 것일까?여행은 탈출이다. 잘 짜여진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촘촘하게 잘 짜여져 있어 나를 보호하지만 너무나 잘 짜여져 나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하는 그런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아무리 가져도 늘 모자란 것 같아 베풀지 못하는 손으로부터, 쉼 없이 경쟁해도 결코 끝나지 않는 싸움에서부터, ‘쟤는 나보다 잘난 게 없는데 나보다 잘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자신을 좀먹는 질시나 분노로부터, 눈앞에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자꾸만 작아지는 나로부터.성장에 대한 강박관념, 경쟁 혹은 싸움, 질시 혹은 분노,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던 그런 것들에 치여 깊숙이 묻혀있던 어떤 것들을 꺼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이다. 그 어떤 것들은 자연이고 인연이고 사랑이고 연민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두를 갈피갈피 느낄 수 있는 여유! 너무나 깊숙하게 묻혀 있어 그리운지도 몰랐었던 것들이다.
다음날 나는 구례에 있었다. 환하게 열려 있는 넉넉한 하늘, 넉넉한 산, 넉넉한 땅, 넉넉한 바람, 넉넉한 마음. 여기저기 피어난 호박꽃이 그 넉넉함을 더했다. 잎으로도 편안하고 꽃으로도 소박하고 열매로도 정겨운 호박처럼 넉넉한 마을들은 이름 모를 외국꽃들로 급조된 도심의 경기장 주변이 아니라 모두 뿌리가 있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마다 넉넉하게 그늘을 만든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눈에 마을의 역사를 증거했으니까.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큰 산이, 쭉쭉 곧게 자란 대나무 밭이, 오래된 돌담 아래 봉선화가, 녹음 사이로 언뜻언뜻 박혀 있는 능소화가 어쩔 수 없는 한반도 남쪽이었다. 아, 그리고! 문득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보랏빛이 섞여있는 연하디 연한 분홍빛의 꽃이었다. 기린처럼 긴 꽃대가 쑤욱 올라와 환하게 피어나는 단순한 꽃. 그것은 상사화였다.
내가 상사화에 대해 들은 것은 상사화를 본 적도 없었던 여고시절, 국어선생님에게서였다. 봄에 먼저 잎을 피우고, 잎이 지고 나면 어느 여름날, 없던 대가 하루밤 사이에 쑤욱 올라와 예쁜 꽃을 피우는 꽃이라고 했다. 잎과 꽃이 만난 적 없이 서로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상사화라고. 그때 내 머릿속 상사화는 어긋난 운명을 내면화해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절실해진 존재였다. 인간이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실제 꽃이 그렇겠는가. 그렇지만 이름과 기억은 집요한 것이어서 나는 상사화에서 분명히 느낀다. 그리움을 소문내지 않고 한없이 유예하고 있는 어떤 존재를. 나는 상사화를 느끼면서 여고시절의 나와 만나고 국어시간과 만났다.
여행은 자기자신에 대한 반추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적응하기 위해 작은 이해관계에 아옹다옹하느라 잃어버린 느낌들, 잃어버린 꿈, 잃어버린 인연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온종일 가볍게 걸었다.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걸은 날은 피곤함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