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요새로 치면 일부 정치인들의 탈당 시리즈가 대표적이려니와, 미련없이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로 갈아타는 못된 관례가 지겹다. 배반의 계절이 또 온 것이다.
여북하면 ‘철새 의원들’이라는 별칭마저 과람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목숨 걸고 만리장공을 날아다니는 진짜 철새들의 한결같은 지향을 감히 더럽히지 말라는 뜻이다. 하긴 어느 세상에나 일쑤 있었던 일이기는 하다.
시오노 나나미가 발췌한 <마키아벨리 어록>(오정환 역)에도 나온다. ‘역사는 우리의 행위를 이끄는 인도자(마에스토로)이며, 지도자에게는 스승(마에스트로)’이라는 전제 끝에 말했다. “사회 구조가 바뀌더라도 누군가가 지배하고 누군가가 지배당하고, 어떤 자는 기꺼이 지배되고 어떤 자는 불만스레 지배된다면,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반역한 자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점에서도 같은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런 해석의 옳고 그름이야 어떻든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지적이 그럴싸하다.
잇속 따라 보따리를 싼 의원들의 궁색한 변명이나 이별사를 떠나, 그들이라고 아무 생각없이 그만한 결정을 내렸으랴.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뺐을 터이다. 출신 지역구를 보면 알조다. 거의 다 지난번 자치단체 선거 때 참패한 곳이기 때문에 볼장 다 본 간판 밑에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갖가지 시위는 많아도 왜 우리 유권자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당신 마음대로 당적을 옮기거나 탈당했느냐고 묻는 데모는 없는 사정이 그걸 잘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고름은 살이 아니더라’는 어떤 당직자의 뒤늦은 자탄이 외려 민망하다. 그보다는 어차피 꺼질 거품을 드러낸 다음의 집 안 추스르기에 힘쓰는 게 낫지 싶다. 돈 주고도 못사는 다이어트 바람이 모든 부문에 한창이니까.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방관자의 관찰법으로 우리나라 정치인의 평생 처신을 때때로 생각한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이날 이때까지 정치를 업으로 삼은 분들의 얼굴이다. 삼김씨가 당장 꼭지점에 나란히 선다. 그렇다고 일률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곡절 많은 나라에서 변신의 곡예가 각기 죽끓듯 아슬아슬했을망정 이제는 죄 끝났다.
일김씨가 아직 현역인 셈이되, 수삼 년 전에 이미 ‘서산에 지는 해’ 소리를 들었다. 이와는 별격의 차원에서 우리에겐 어째서 위대한 이인자가 없을까를 헤아리는 마음 아프다. 너도나도 일등을 다퉈 그만한 존재를 키우던가 인정하지 않은 탓인지, 풍토 자체가 워낙 그렇기 때문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그래서 데이비드 히던과 워렌 베니스가 함께 지은 책 <위대한 이인자>(‘Co-Leaders’•최경규역)를 새삼스럽게 펼친다. 원제를 알기 쉽게 풀었거늘 일인자의 그늘로 만족한 협력자(이인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정치 경제 학문 스포츠에 걸쳐 다양하다. 아무래도 미국의 사례가 많다.
능력으로 치면 오히려 일인자를 능가하고 남으면서도 소리없이 뒤를 받쳐 준 사람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일생을 마오쩌둥을 위해 헌신한 저우언라이의 공덕이 특히 감동적이다. 보기 드문 정치적 통찰력과 겸손의 소유자인 그는 항상 편하고 조용히 일인자를 도왔으며, 언제 어떻게 물러날 것인가를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러기를 42년, 지식인 저우언라이는 앞에서 달리는 농민 마오쩌둥을 뒤따라가며 험난한 길을 융통성 있게 헤쳐나갔다. 마오쩌둥은 그처럼 위대하고 충성스러운 조연(助演)을 막판에 버렸으나 중국 인민들은 9개월 후에 죽은 마오쩌둥보다 그의 죽음을 더 슬퍼했다.
대외적 평가는 더더욱 높았다. 닉슨의 말에 그런 함의(含意)가 넘친다.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돌이켜 회상하는 한국의 정치사에는 그와 같은 미덕의 소유자가 눈을 씻고 볼래도 없다.
가신은 있되 실력과 겸양을 갖춘 이인자는 없고, 일인자 역시 그가 ‘기어오른다’고 여기는 순간 생으로 고려장을 시키기 마련이었다. 군사 독재와 지역 감정이 그 어간에 또 심한 농간을 부렸다. 아무려나 또 다시 단물만 찾아 나선 군상에 기어코 학질을 떼는 기분 한번 고약하다. 최일남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