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무릎 밑에 까만 점이 있는 사람은?” “이태희” “생선을 ‘꼬야’라고 하는 사람은?” “이건희” 태희와 건희는 다섯 살, 세 살인 조카고, 그렇게 정답을 제일 잘 찾아가는 조카는 여섯 살 된 강희다. “올 여름에 가장 재미있었던 사건은?” “월드컵 4강!” “올 겨울에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대통령 선거!” 여섯 살 강희도 아는 사건,
대통령선거는 올 하반기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일 터였다. 그렇지만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말에 김이 빠진 지 오래였다. 너무나 뻔한 싸움으로 보였으니까. 적어도 ‘후보 단일화’가 성사되기까지는 그랬다.
누가 이길 것인지 예정된 싸움은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흥미를 끈 것은 ‘대세론’을 따라 보따리를 싸는 철새정치인이었다. 노선도 없고 신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세상물정에만 밝을 때 그걸 어떻게 설명할까?
세상물정만 너무나 잘 알아서 세상이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을 보는 흥미는 건강한 놀이라기보다는 안될 것을 본 것 같은 조바심이었고 분노였다. 나는 정치인 JP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JP가 잘 나갈 때 거기에 빌붙어 지역감정으로 수월하게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지낸 사람이 JP가 어렵게 되자 뒤돌아서 JP를 비난하면서 한나라당에 와서는 이렇게 말할 때는 분명히 경악했다.
“이회창 대통령 만들려고 한나라당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내세워서 ‘전진대회’니 ‘필승결의대회’니 하는 것들이 열릴 때 당신은 무엇을 느꼈는가?
그 지긋지긋한 지역감정을 타고 이 정권에서 최고의 혜택을 받아 장관이나 장을 지내 이 정권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는 이가 책임은커녕 그 지위를 가지고 새로운 맹주를 찾아 투항하고는 또 다른 투항자를 찾아나설 때 그런 이에게 맡겨졌었던 국가가 얼마나 부실했겠는가, 그리고 부실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는 않았는지. 그런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행태에 대해 물으니까 TV에 나온 이회창 후보가 이렇게 대답한다. 국가혁신에 동참할 사람이면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나는 정말 궁금하다. 이 후보가 정말로 그런 사람들로 국가혁신이 된다고 믿고 있는지. 인간적인 의리는 엿 바꿔먹고 강한 힘에 빌붙은 것이 노선이 된 그들은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있으면 거기 줄서 기득권을 누릴 인간들이고, 미국이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주장하면 거기에 기대 미국의 이익을 한반도에 관철하면서 그걸 ‘보수’라고 주장할 수구냉전 기득권세력들이다.
그런 그들을 ‘철새’라고 할 때는 철새를 모독하는 것이고 그들을 ‘변절자’라고 말할 때는 ‘지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번도 지조를 지키려 해본 적이 없으니까. 똑똑히 보자. 누가 의리도, 지조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로지 일신상의 부귀영화를 따라 권력을 찾아가는지. 똑똑히 보고 뽑지 말자.
어떤 집에 먹을 것이 있을지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는 도둑 같은 그런 사람들을. 갈취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할 권력이니까. 그런 사람을 몰라본 건 우리의 무능이었다. 우리의 무능이 대가를 혹독히 치러 그런 행태를 보게 만든 것이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지역감정이나 기타 다른 이해관계에 얽혀 투표한 우리의 투표행태를 반성해야 한다.
이제 김빠졌던 대통령선거에 탄력이 붙고, 그 만큼 흥미를 끌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 탄력이 붙은 것은 누가 될지 예측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극적으로 이뤄진 ‘후보 단일화 합의’는 대선정국의 구도를 바꿔놓는 일대의 ‘돌물목’이었다.
정말로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까? 이뤄진다면 누가 단일후보가 될까? 단일후보가 확정되면 후보가 되지 못한 정치인이 그 결과에 승복할까?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새롭고 참신한 정치를 구현하고 싶다면 후보 단일화 절차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치밀하게 합의하고 그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승복’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 신의를 저버리는 정치를 보는 것은 그것이 대통령 선거든, 국회의원 선거든, 지자체 선거든 이제 신물이 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