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미군이 몬 장갑차에 깔려죽은 것이다. 전쟁상황도 아니고 비상사태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무란다. 평화시에 사람이 사는 동네에서 사람을 깔려죽게 해도 죄가 안 되는 공무는 도대체 뭘까?
그 죽음은 인생무상을 상기시키는 죽음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는 만큼 잔혹해서 “공무”를 주장할수록 기막힌 죽음이었다. 우리 딸들은 우리 땅, 우리 동네에서 전쟁도 아닌 평화시에 그렇게 기막히게 세상을 떠났는데 그 아이들을 죽게 한 미군들은 우리 법정에 서지도 않았다. 그들은 적당히 어정쩡하게 요식행위로 치러진 미군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되는 거라고 분노해서 미군기지에 항의하러 간 우리 대학생들은 우리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할까?
‘신식민지’라는 말이 괜히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효순이와 미선이는 영정에 모셔져 미국에 갔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얼굴이 백악관 앞에서 서성거릴 때는 뭉클했다. 억울하게 삶을 반납한 어린 혼의 설움이 풀어질까, 하고. 억울한 그 죽음은 기폭제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쌓여왔던 한미간의 불평등이 독이 되어 토해지고 있는 것이다. 품고 있어서는 안되는 독이었다.
어린 혼의 설움과 이 땅의 분노를 가슴에 품고 찾아간 이 땅의 어른들은 단식을 하고 혈서를 썼지만 백악관의 대문은 단단하기만 해서 오히려 그들이 재판을 받고 돌아왔다. 미국은 오만했고 그만큼 미 경찰은 폭력적이었다. 살아있는 시민들이 그 사태를 두고 보지 않았다.
그저 두고 본다는 것은 신식민지를 용인하는 일이므로. 신부님들이, 스님들이, 목사님들이 3주 전부터 광화문, 그 시끄럽고 춥고 불편한 한데에서 일주일씩 릴레이단식으로 부당함을 알리고 있고 시민들이 광화문으로, 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부산에서도, 광주에서도, 대구에서도 모였다. 그리고는 촛불을 밝혔다. 수십만의 반딧불이, 나도 하나의 불빛이 되었다. 춥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작은 불들의 합창, 시청 앞 광장은 그 불들로 엄숙하고 숙연했다. 성냥팔이소녀의 성냥불처럼 슬프고 환상적인 불빛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불빛처럼 슬픔의 여운만을 남길 불빛은 아니었다. 모두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 그렇게 힘이 된 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가락은 자꾸 눈물이 났다. 돌연히 상기하게 된다. 그때 그 뜨거웠던 함성이. 열정으로 더위를 잊었던 그 여름의 월드컵이. 이번 촛불시위는 그 누가 비아냥거리듯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주도되는 불순세력의 시위가 아니라 시청 앞을 붉은 색으로 물들였던 그때 그 세대들이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외침이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 그때 그 젊음을.
그 세대들은 ‘공동체 문제는 외면하는 개인주의 세대’로 폄하되었던 세대들이기도 하다. 햄버거와 콜라에 익숙하고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는 그 세대들이 무작정 반미의 깃발을 든다고 따라갈까? 이 ‘반미’는 단순한 반미가 아니다. ‘AGAIN 1966’ ‘Pride of Asia’로 말을 했던 그 세대들이 주권국가로서의 자존심을 불꽃으로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그날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개인적인 슬픔과 유감”을 전했다고 보도된 날이었다. 그런데도 전국의 도시에는 꾸역꾸역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촛불을 들었다. 그 이유가 뭘까?
평생을 장애자와 함께한 문정현 신부의 발언이 눈길을 끈다. “그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기만입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부시의 개인적인 슬픔을 전달받아 어디에 쓸까? 부시는 미 대통령으로서 공개사과하고, ‘강대국의 오만이 담긴 문서’라고 평가되는 SOFA를 개정해야 한다. 3중4중으로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미국 대사관의 자업자득이 측은하기까지 했던 밤이기도 했다. 그들이 그렇게 내세우는 ‘정의’를 실현하면 저렇게 경찰력에 기대지 않아도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