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공명통을 가슴에 안은 채 손가락으로 음정을 고르고 튕기는 폼만 잡았기 때문에 연주 실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맞바로 들었다 한들 나 같은 음치에겐 그 소리가 그 소리였겠으나, 이마의 굵은 주름살과 더불어 웃던 인상이 오늘 다시 새롭다.
딱 한 차례 노래 몇 소절을 듣기는 들었다. ‘청문회 스타’로 한참 이름이 뜰 무렵, 인터뷰어 자격으로 만난 자리에서 그는 ‘추억의 정거장’을 불렀다. ‘가랑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정거장…’으로 시작하는 유행가 앞머리를 낮게 읊조렸는데, 좋아하는 곡목이 대부분 낯설었다. 십팔번으로 꼽는 ‘이정표’도 그렇고, ‘초원의 빛’이나 ‘마지막 데이트’ 같은 노래를 웬만한 대중가요집에서는 찾기 힘들다. 희소성을 과시하고자 배운 것이라고 했다.
16대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갖가지 주문과 달라진 세상의 앞날을 점치는 말과 글이 즐비한 와중에 이 무슨 미시적 화두인가 싶기는 하다. 취미는 어디까지나 취미일 뿐, 마침내 청와대 주인이 된 이의 막중한 치세 자질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그림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역대 대통령들의 가슴에 갖다 붙이면 영 걸맞지 않던 기타가 그에게는 썩 어울리는 연유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뀐 세월의 상징을 거기서도 읽을 수 있다면 침소봉대의 과장이 심하다. 상상이 지나치지만 투표 전야의 치졸 무쌍 해프닝과 함께 이참에 경험한, 각본에도 없던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여린 감성에 다시 젖게 한다.
이번처럼 눈물이 잦은 대선을 치른 것도 처음이다. 패자는 물론, 승자도 고난의 역정을 담은 눈물방울을 사진으로 미리 흘렸다. 노사모 회원들이 마지막에 터뜨린 기쁨의 눈물 또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인데, ‘노풍’의 텃밭 구실을 했던 그들의 출발점은 애초에 나약하지 않았다.
지역감정을 깨기 위해 종로를 버리고 내려간 부산에서, 삼세번 뺨을 맞고도 눈 흘기지 않은 사나이의 용기에 감응하여 태동한 모임이다. 일시적 포퓰리즘과는 다른 자발적 팬클럽인 까닭에 성취감이 남달랐을 터이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젊은 의지의 확대 재생산이 대선 결과로 나타난 셈이다. 그걸 두고 세대간 갈등이랄지 긴장을 걱정하는 여론 역시 높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앞세우고, 막연한 이미지가 논리를 압도하기 쉬운 상황에서 늙음은 곧 왕따의 대상인가 자괴한다. 갖은 고생 다하며 나라를 이만큼이나마 지탱해온 게 누군데, 입에 발린 ‘어르신네’ 소리로 우리를 내치는가 충격에 잠기기도 한다.
하지만 기성세대도 여러 가지고 젊은 세대도 여러가지다. 주눅들고 불안해 한다든가, 어느 세상에나 있었던 신구 알력의 한편짝에 계속 안주하지 말고 변화의 내용을 꼼꼼히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래를 염두에 둔 서로 다른 역할 분담이 그때 가능하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16대 대통령 선거의 제일 큰 과제는 썩어빠진 정치를 걷어치우자는 것이었다. 20~30대 젊은 힘이 그런 기틀을 마련해 주었으며 일상화된 그들의 인터넷이 돈이나 조직을 무력화시켰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계량화되기 일쑤였던 첨단 이기가 민심을 실어나르는 정치적 기능까지 해낸 선례를 톡톡히 맛본 것이다.
제3언론의 가시화가 엄연했다. 이런 과정에서 특히 보수 야당 후보자에게 치우쳤던 거대 언론의 저런 보도를 그냥 보아넘기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빗나간 정세 판단은 여하간에, 인터넷에 좍 번진 민심조차 못 따라간 형국이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내세운, 관례적으로 뜨뜻미지근한 화합을 운운하기 전에, 냉철한 자체 검증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누가 화합을 마다하는가. 누가 지역감정 타파를 싫다 하는가. 백번 좋은 말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반성할 건 반성하는 토대 위에서 나온 주장이라야 설득력이 붇는 법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게는 지금부터가 차라리 가시밭길일 공산이 크다. 하지만 어차피 혼자 ‘한필의 말을 타고’(匹馬單騎) 여기까지 온 처지다. 차근 차근 일을 추리며, 쓸쓸할 때는 기타를 안고 한 곡조 튕겨 시름을 잠시 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