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상 고려대 교수 | ||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의 부실채권은 2백조원이 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이 동반 붕괴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정부는 급히 공적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1백56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자 금융시장이 안정되고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또 대외 신인도가 올라가면서 외환위기가 사라졌다. 이렇게 볼 때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은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부실채권 발생의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 파악도 제대로 안하고 퍼주기식으로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것이다. 처음 64조원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공적자금이 1백56조원으로 불어났다. 기업주들이 자금을 빼돌리고 금융기관들이 속이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주인 없는 돈처럼 마구 지원하는 바람에 회수율이 30% 수준에 그치고 국민 1인당 부담액이 2백만원이 넘게 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민들은 세 번 운 셈이다. 첫째, 외환위기가 터지며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대거 무너지자 2백만 명에 가까운 근로자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서 울어야 했다. 둘째,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추진한 신자유주의식 구조조정은 중산층을 무너뜨리고 사회의 허리를 끊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미봉에 그친 구조조정 정책으로 대우그룹이 부도나고 현대그룹이 해체되는 등 경제가 또 위기를 겪자 근로자들은 제2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셋째, 공적자금 관련 책임자들은 뒤로 숨고 영문도 모른 채 국민들은 1인당 2백만원 이상 억울한 부담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대관절 경제를 부실하게 만들고 공적자금의 덤터기를 국민들에게 씌운 장본인들은 누구인가? 금융기관을 사금고처럼 이용하며 빚더미 경영을 하다가 기업을 쓰러뜨린 부실기업주들, 이를 방조하며 반대급부로 정치자금과 뇌물을 챙긴 비리정치인과 공무원들, 예금자들의 돈을 마음대로 내주고 금융기관의 부실을 자초한 금융관련자들 등이 바로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먼저 이들에 대한 책임추궁을 명확히 해야 한다. 다음, 공적자금은 최소한으로 투입하고 투입한 돈은 최대한 회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원칙을 무시하고 정부는 부실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겉치레로 끝냈다. 그리고 급할 때마다 공적자금을 무모하게 투입하고 책임을 국민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부실기업 정리와 공적자금 투입에 관치와 정치 논리가 작용했다는 것이 근본 문제다. 외환위기 직후 경제가 붕괴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회생이 어려운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과감히 퇴출시키는 등 획기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구조조정은 시장 기능을 배제한 상태에서 원칙과 일관성이 없이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생사를 정부 자의에 따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선택된 기업과 부실관련자들은 공적자금의 혜택과 면죄부를 받고 그렇지 못한 기업들은 부도와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비효율이 나타냈다.
더구나 2000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구조조정을 사실상 유보하고 경기활성화로 경제정책 방향을 선회했다. 더욱 큰 문제는 기업과 금융기관을 외국자본에 넘기면서 매각대금의 몇 배에 이르는 공적자금 특혜를 준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제일은행의 경우 단돈 5천억원에 매각하고 17조원의 공적자금 투입을 허용했다. 허리가 휘는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외국자본을 배부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공적자금 문제는 이대로 넘길 수 없다. 천문학적 규모의 부실채권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누구의 책임인가? 정책오류와 파행으로 공적자금 투입을 증가시킨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누구의 지시인가? 공적자금을 투입할 때마다 대부분 회수할 수 있다고 장담했던 사람들은 왜 말을 못하는가? 부실기업들이 빼돌린 재산은 얼마나 되며 왜 회수를 못하는가? 정부는 이에 대한 답을 빨리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손실 부담을 기정사실화한다면 국민들은 정부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