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향 수원대 교수 | ||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말을 못한다는 것은 무능이다. 당연히 표현은 겉치레가 아니다. 아는 만큼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표현할 줄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늘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면!
그러나 노장과 불교가 뿌리인 동양의 전통에서는 그렇지 않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말을 믿지 않는다. 말을 한다는 것은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늘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 관계라면 그 만큼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는 침묵이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관계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말을 잘한다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욕이다. 달변가라는 것은 생각 없이도 말이 술술 나오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남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뜻이며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토론의 달인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맥락이다.
대통령은 “토론의 달인”이고 검사들은 말을 잘하지 못하니 토론으로 검사들을 누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검사의 말로 시작된 그 토론회는 시작부터가 이상했다.
언어로써 실체적 진실을 찾아가야 하는 검사들인데! 토론의 장에 뽑혀 나올 정도의 인사들이 말을 못한다는 얘기는 왜 할까? 동양사람의 전통을 알고 있다는 뜻일 수 있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해도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아집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 아집으로 어떻게 대화를 하겠다고 나섰을까?
말이라는 게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대통령은 토론의 달인이시니까…” 그 말의 맥락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이는 대화의 상대로 나선 대통령이었다. “저를 말재주로 진실을 가리는 그런 인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는 토론을 잘하기 위해 때로는 하고 싶은 것도 안했습니다.”
그렇구나, 예를 들면 검은 돈을 물 쓰듯 만들어 쓰면서 ‘정치자금법’을 개정하자고 할 수는 없는 것일 테니까. ‘정치개혁’이라는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대상으로 살아와서는 설득력이 없는 거니까. 정말 그는 토론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를 아는 토론의 달인이었다.
검사들은 2시간 내내 주장했다. “인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너무도 분명하고 당연한 말에 나는 왜 박수를 치지 못했을까.
자성(自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사권을 쥐고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만 꿈꿨던 것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해온 그들의 행태를 어떻게 바꿔갈 수 있을 것인지, 그 제도적 보완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이 없었던 것이다.
검사들은 토론의 말미를 검사생활에 대한 감상으로 장식했다. 정말 열심히 일한단다, 정말 고생한단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진심을 보듬고싶지 않았을까? 만일 청소부들이 나와서 그렇게 말했다면 우리는 열심히 경청하고 깊게 공감했을 것이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라는 시의 의미까지 되새겨가며. 그런데 왜 검사들의 고생은 공감하지 못하는가? 높은 사람들에 대한 질투인가?
검사들이 고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생 때문에 누리는 권리는 또 얼마나 막강한가. 의정활동하랴, 회의 참석하랴, 지역구 관리하랴, 사람들 만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고생스러운데’라고 하면 통할까.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고생스럽다고 하면 그 말은 고백이라기보다는 투정이다. 당연히 연민이 드는 것이 아니라 반감이 든다.
궁극적 진리는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참모습에 대해 떠들고, 입으로 불성을 깨우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존재의 감옥일 테지만 그러나 또 일상에서 언어는 대부분 존재의 집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문제 많은 세상에서 대화와 토론은 정말 중요하다. 해야 하는 말, 삼켜야 하는 말은 대체로 그 인격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