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남 언론인 | ||
그리고 십여 년이 흘렀다. 세월이 많이 지난 만큼 파괴력이 강하고 적중률이 높아졌다는 갖가지 미국의 신무기엔 그러나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능히 예견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대의 무기수출국답게 전쟁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을 들고 나오는 나라의 군산(軍産)복합체 구조가 이번이라고 어련하랴 짐작했던 탓이다.
그보다는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전쟁 발발 이유에 더 주목한다. 12년 전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따른 유엔의 결의를 업고 싸움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승인을 얻지 못했다. 미국 본토는 물론 세계사에 예가 드물 정도로 요란한 반전 데모를 무릅쓰고 부시 대통령은 ‘한다면 한다’는 초지일관의 자세를 기어코 굽히지 않았다. 개전 이유로 내세운 이라크 국민의 해방과 대량살상무기로 인한 세계안보 위협이 도무지 엉뚱하다.
시쳇말로 전쟁의 ‘컨셉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건 전쟁도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다. 전쟁은 최소한 피아(彼我)의 전력이나 능력이 어지간히 비등하든가 팽팽해야 객관적으로 일단 그럴싸하다. 개인소득 6백달러도 못되는 나라에 미·영의 30만 대군이 쳐들어 갔으면 ‘승리’라는 말 자체가 초라한, 일방적 침공이다. 견문발검(見蚊拔劒)에 가깝다.
후세인을 물고내기 위해 벌인 진군이요 거사라고 했는데 이라크에는 후세인 말고도 2천2백만 명의 국민이 산다. 그들은 더구나 오랫동안의 경제제재조치와 전란에 지쳐 생활이 말이 아니다. 의료시설과 약이 없어 죄없는 어린 것들의 사망률이 날로 늘어간다고 했다. 그중에 특히 참담한 것이 TV에서 더러 접하는, 선천성 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의 몰골이다.
91년 걸프전 때 투하된 열화우라늄의 영향이라고 한다. 퀭한 눈과 파리하게 시든 팔다리로 누워 지내는 그들에게 ‘눈 달린’ 스마트탄은 무엇이고 땅속 30m까지 뚫는 동굴 파괴탄은 무엇인가. 미국이 표방하는 인도주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로지 후세인 하나만을 목표로 삼는다고 했으므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목숨을 다하면 그만일 터이다. 생포할 경우는 80년대 말 파나마의 노리에가를 마이애미로 끌고 와 유죄선고를 내린 전례를 좇아 국제법정 같은 데에 세울 작정인 듯하다. 그런데 그의 생사와 은신처를 탐색하는 과정이 아프간에서 빈 라덴을 찾던 모양과 흡사하다.
여기서 불가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한반도의 현실이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세 나라 중 하나가 곧 북한이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밥상머리에서 버릇없이 구는 아이’라고 일렀다. 지난해 5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에게 메달을 수여하기에 앞서, 공화당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그와 같은 험구가 아니라도 그의 북한 핵을 둘러싼 ‘일전불사’ 의지는 이런 저런 언행에서 여러 번 감지되었다.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 차례’라는 우려가 그래서 공공연하게 떠돈다.
공교롭게도 그의 아버지 부시의 재임시에 치른 걸프전 다음 다음해에도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 탈퇴 선언과 맞물린 한반도 위기설이 나돌았다. 출처가 불분명한 전쟁 시나리오가 미국과 일본 신문에 무책임하게 게재되었다. 서울을 겨냥한 북한의 대규모 포격으로 개전 초엔 수만의 희생자를 냈으나 평양 또한 미구에 박살나 남한의 승리로 끝난다는 식으로 꾸며진 각본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울의 일부 부자동네 주민들의 사재기 현상이 CNN 카메라에 잡혔다.
한데 최근에는 사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설과 더불어 야기된 해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태평스럽다는 불만(?)이 미국 고위당국자들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맞다.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이 땅의 전쟁은 죽어도 막아야 한다. 소위 대동아전쟁으로 생의 떡잎이 일찍 잘리고, 동족상잔의 피를 보고 자란 세대의 소망을 담아 반전·평화를 간절히 외친다. 석유도 안나는 나라에 다시는 전쟁의 비구름을 띄우지 않도록, 중학생 시절에 외운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저런 괴멸을 상기하며 결의를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