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훈 언론인 | ||
‘신언서판’은 원래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선발할 때의 네가지 기준 즉 체모와 풍위(風威), 언사의 변정(辨正), 해법(楷法)의 준미(遵美), 문리의 우장(優長) 등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뛰어난 인물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신수와 말씨, 문필과 판단력 등 이른바 `‘신언서판’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도 옛 당나라 때의 관리 선발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어떤지는 몰라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신언서판이 뛰어나서 손해볼 건 없지 않는가.
민주당의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신언서판’ 중에서도 ‘신(身)’에 자신이 없었던지 얼마 전 이마의 주름살을 없애기 위해 주사를 맞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주름살 문제는 일찌감치 털어놓아 그런대로 넘어가는가 했더니 이번엔 ‘언(言)’쪽에서 말썽이 났다. 공개된 장소에서 ‘깽판’이니`‘에이 썅’이니 하는 저속한 말을 입에 올렸다고 해서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에이 썅’은 ‘안 시장’이라고 한 것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해명을 했지만 오해가 쉽게 풀릴지는 모르겠다.
‘신’에 신경을 쓰는 것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차가운 엘리트’라는 인상을 불식하기 위해 안경테를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는 걸 보면 국민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에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다.
그의 빛나는 은발(銀髮)을 볼 수 없게 된 것도 대통령의 꿈을 가꾸면서 머리를 흑갈색으로 염색했기 때문이다. 시장상인을 만나면서 애써 점퍼차림을 고집하는 것 역시 말끔한 양복차림으로는 서민들의 속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후보 모두 텔레비전 토론을 앞두고 얼굴화장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것도 ‘신’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신언서판 중에서도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역시 ‘신언’쪽보다는 ‘서판’쪽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자리가 속된 말로 ‘얼굴마담’이 아닌 다음에야 얼굴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 무슨 큰 대수랴. ‘언’ 역시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는 어차피 모든 담화나 연설문은 모두 유능한 참모들에 의해 작성되고 가다듬어질 것이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서판’이야말로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대통령 스스로 터득하고 가꾸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서’는 단순히 글씨를 잘 쓰거나 문필에 뛰어난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한 시대의 평균적인 교양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문학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새로 취임하는 장관들에게 셰익스피어전집을 선물했다는 일화는 한 나라의 국정을 맡은 사람에게 인문적인 교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언서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판’이다. 세상의 이치를 알고 미래를 내다보는 합리적인 판단력이야말로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드러난 두 후보는 모두 판사 출신이기 때문에 판단력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판단력은 판사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대통령의 판단력은 법조항을 기계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담긴 법정신을 제대로 읽어내는 보다 종합적이고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판단력이어야 한다.
대선후보들은 앞으로 남은 6개월여동안 여러 차례의 검증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누가 보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으로 국정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능력을 갖추었느냐에 검증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