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증거물 배척” 김승준 9단 기사직 걸고 재검토 요구…김성룡도 유감 표명 및 재조사 요구
김승준 9단이 윤리위 보고서를 보며 재조사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일요신문] 김성룡 프로기사직 제명으로 꺼진 줄 알았던 ‘바둑계 미투’ 불씨가 윤리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되살아났다. 미투 피해자 측을 대변하는 김승준 9단은 “한국기원 윤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 존재 자체가 3차 가해”라고 주장하며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를 대상으로 대규모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성룡(전 프로9단)도 즉각 유감 표명과 함께 재조사 요청서를 SNS에 공개했다.
지난 4월 김성룡 성폭행 의혹사건이 터지자 한국기원 운영위원회는 윤리위원회(이하 윤리위)를 구성해 4월 17일부터 6월 1일까지 소속 프로기사 김성룡과 코세기 디아나(헝가리 국적, 이하 ‘디아나’)를 조사했었다.
성폭행 의혹사건 가해자로 조사받은 김성룡.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승준은 “프로기사 350명 중 175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곧 정식 요청서를 들고 한국기원 유창혁 사무총장과 홍석현 총재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재검토 후에도 같은 결론이 나온다면 내가 프로기사직을 은퇴하겠다”라고 말했다.
공개된 윤리위 보고서 26페이지 종합의견 1에는 ‘디아나의 협조가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두 당사자의 진술을 종합적으로 볼 때 김성룡의 진술이 디아나의 진술보다 일관성과 신빙성이 더 높다’라고 쓰여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김승준은 “디아나는 증인 다섯 명이 피해자의 말을 입증하는 진술서를 제출했다. 또 9년 전 사건 직후 오빠와 상의하기 위해 보냈던 이메일도 제출했었다. 그러나 결정적 증거물 이메일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배척했다“라고 주장했다.
김승준은 보고서 내용 중 ‘바닷가에 같이 간 것이 김성룡이 아닌 다른 기사일 수 있는데 그걸 혼동할 정도라면 그날 사건이 있었던 기억에 대해서도 신뢰를 주기 어려울 수 있다’라는 부분도 “증거 없이 김성룡 변호사가 말한 내용만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추론했다”라면서 문제 삼았다.
바닷가 이야기 외에도 준강간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등 보고서 여러 대목에서 진실과 다르게 김성룡 측을 편드는 진술이 많다면서 ”김성룡 제명과 무관하게 이 보고서가 힘겨운 미투과정을 모두 거짓말로 만들어 버렸다. 윤리위 보고서는 존재 자체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가해다“라고 말했다.
윤리위 보고서 재조사 서명운동에 유명 기사들이 대거 동참했다. 이창호 9단과 최정 9단의 서명.
한편 김성룡은 성폭행 의혹이 제기된 이후 몇 달씩 잠적해 있으며 윤리위조사과정부터 재심청구까지 일관되게 ‘합의에 의한 성행위’임을 주장했다. 즉 성관계 시도가 있었지만 성폭행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김성룡은 김승준의 서명운동이 바둑계 이슈로 떠오르자 8월 31일 지인 Y 씨를 통해 ‘유감 표명_재조사요청서’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대한바둑협회 밴드(SNS)에 공개했다.
‘어찌 보면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날에 그것도 4명이 함께 바닷가를 갔다는 것은 디아나에게 불리한 내용이 될 수 있음에도 끝까지 그날에 바닷가에 갔다고 고집하는 것은 디아나에게 가장 중요한 증거라고 하는 이메일에 가치가 훼손되면 모든 주장들이 무너지는 거짓말 같은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외국인 증인까지 세웠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저는 왜 그날의 바닷가를 간 기억이 없을까요. 당연히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한국기원은 반드시 공정하게 재조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 분명히 디아나가 주장하는 바닷가를 간 날 서울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승준은 “김성룡은 재조사 요구를 말할 자격 자체가 없다. 윤리위 조사과정에서 한 번도 출석하지 않고, 특히 바다 이야기 부분에 대한 답변서엔 모른다는 말이 다였다”라고 말한다. 사실 확인을 위해 김성룡에게 직접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다 이야기에 관한 김성룡의 답변이다. 윤리위 보고서 요약본 캡처.
한국기원 프로기사회를 대변하는 손근기 기사회장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규정과 절차에 따라 한국기원 이사회에서 결론이 난 문제다. 프로기사에게 제명이란 사형과 마찬가지인 결과다. 김승준 9단은 재조사를 통해 다른 결론을 원하는 것인가”라고 되물으면서 “하지만 이 사안은 이미 프로기사 다수가 재조사 서명에 동참했기에 18일 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하고, 10월 한국기원 정기이사회에 안건으로 올릴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내용을 전하자 김승준은 “내가 주장하는 재조사의 의미는 현재 한국기원에 보관되어 있다는 144페이지에 달하는 조사 원본 파일(최근 공개된 요약본이 아닌)을 가지고 양자가 인정하는 공정한 위원회가 당사자에 대한 추가조사 없이 오직 서류만 재검토해 단시간 내에 결론내자는 뜻이다. 특히 윤리위원장이 일방적으로 판단해 배제한 이메일에 대한 증거능력도 추가 검토해주길 바란다”라고 설명했다.
페이스북 공개 그룹 ‘디아나 사범님과 함께하는 사람들(With you, Master Diana)’ 캡처 사진. 이 그룹 멤버 숫자는 이미 4300명을 넘어섰다.
바둑계 미투사건 초창기부터 디아나 페이스북 관리자로 활동하고 있는 남치형 초단(명지대학교 바둑학과 교수)은 “사실 미투는 억울함을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데, 용기 내서 세상에 알린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너무 묻혀버리는 것 같다. 바쁘게 사느라, 자신의 성공에 목매느라 관심을 두지 못했던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미투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 아닐까”라며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현재 페이스북 공개그룹 ‘디아나 사범님과 함께하는 사람들 (With you, Master Diana)’ 멤버 숫자는 4300명을 넘어섰다.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