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있어 봐.”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윽박지른 뒤에 다시 손을 밀어 넣었다. 문지영은 깊숙한 부분에 손가락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무릎을 바짝 오므렸다.
“아이…, 술부터 마셔요.”
문지영은 교태를 부리면서 사내에게 맥주잔을 내밀었다. 맥주를 반 컵이나 벌컥벌컥 마신 사내가 이번에는 문지영의 어깨를 안더니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바닥 안에서 그녀의 가슴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사내는 술이 잔뜩 취해 있었다. 나이는 얼추 40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수염이 까칠하고 주걱턱이었다.
“나 말이야. 5만 원밖에 없거든….”
사내가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5만 원은 기껏해야 기본이었다.
“그러니까 5만 원어치만 마시고 갈 거야.”
“이게 5만 원이에요.”
문지영은 냉랭하게 말했다. 5만 원짜리 손님에게 스커트 안이나 가슴을 맡길 수 없었다.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말 상대를 해준 뒤에 30분 만에 내보냈다.
밖에는 빗줄기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문지영은 담배를 피워 물고 창문 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골목의 아스팔트 바닥을 때리는 겨울비가 스산했다. 날씨는 포근한 편이었으나 푸줏간처럼 붉은 색등을 매달아 홀 안의 분위기가 더욱 썰렁했다. IMF 상황이라 그런지 하룻밤 내내 손님이 없는 날도 있었다. 오후 5시경부터 문을 열기 시작하여 새벽 4시에 문을 닫는 이런 술집은 하루에 서너 손님은 받아야 유지가 되었다.
‘명색이 경제학과를 다녔으면서도 IMF가 오는 걸 몰랐다니….’
문지영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의 무지가 혐오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술집에 나오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차라리 오늘은 쉴 것을….’
오준태와의 격렬한 섹스가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그는 지금쯤 그녀의 방에서 뒹굴며 책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섹스를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문지영은 하루 쉴 생각을 접고 한푼이라도 벌자고 출근을 했던 것이다.
술집에 나오자 때 아닌 빗방울이 추적대기 시작했다. 마담은 그녀가 출근을 하자 옆집으로 고스톱을 치러 갔다. 손님이 없을 때는 같은 술집들이 죽 늘어서 있는 골목이라 몇몇 마담이 어울려 고스톱을 치고는 했다.
‘오늘도 손님이 없으려나?’
문지영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앉아 있는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문지영은 지방대학을 나와서 취직을 하지 못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건설회사에 경리로 취직을 했었다. 문지영이 처음 경리로 다닐 때만 해도 그 회사는 비교적 건실한 회사였다. 월급도 또박또박 나오고 회사는 여러 가지 건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은 320억짜리 큰 공사도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IMF가 오기 1년 전부터 자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봉급이 밀리기 시작하고 자재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320억짜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공을 하게 되면 80억을 받을 수 있었다. 사장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고 사채까지 끌어들여 회사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문지영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던 생소한 경제용어들이 매스컴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더니 급기야 IMF가 터지고 말았다. 80억 원의 공사비를 받아야하는 대기업도 부도가 났다.
“이럴 수가…. 어떻게 청산건설이 부도가 난단 말이야.”
사장은 회전의자에 앉아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청산건설의 부도는 하도급업체인 문지영이 다니던 건설회사가 공사대금 80억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년 동안의 공사에서 240억을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 공사대금 80억을 받아야 했으나 공중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사장이 먼저 해외로 도피했다. 은행에서 압류가 들어오고 사채업자들이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데리고 와서 사무실 집기를 때려 부쉈다.
문지영은 회사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IMF 탓이라고 생각하고 해외로 달아난 사장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문지영은 회사에 다니는 동안 2000만 원이나 저축을 해두었다. IMF라고 남들은 모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문지영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저축한 돈이 있어서 어려운 시절을 충분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지영은 아버지가 있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문지영의 아버지는 대전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IMF라 식당도 파리를 날리고 아버지도 식당을 낼 때 빌린 사채 때문에 업자들로부터 독촉을 받고 있었다. 문지영은 한 달 동안 식당 일을 거들면서 쉬었다. 그러나 계모가 그녀가 식당 일 거드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빠, 급한 돈이 얼마나 필요해?”
어느날, 문지영은 아버지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그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왜, 돈이 필요하면 니가 줄래?”
아버지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문지영을 건너다보았다.
“내가 빌려줄 수도 있지 뭐.”
“인마, 아빠는 조건 없이 주었는데 너는 빌려줘?”
“아빠, 나도 돈을 모아서 시집을 가야 하잖아.”
“그래, 사귀는 놈은 있냐?”
아버지의 질문에 문지영은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한때 동거까지 했던 남자친구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라왔다. 그 남자 친구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아빠, 사위 될 사람한테 놈이 뭐야?”
“흐흐…, 곱게 키운 내 딸 데리고 가는 도둑놈이 뭐가 이뻐서 대우를 해주겠냐?”
“아빠 때문에 시집 못 가겠네.”
“눈치를 보니 애인도 없는 것 같은데 뭘 그러냐.”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구…. 아빠 돈 때문에 힘들지 않아?”
“그렇다고 딸한테 신세지겠냐? 내가 어떻게 하든지 해결할 거야.”
“우선 내 돈 쓰고 나중에 아빠가 잘 되면 갚아 주면 되잖아.”
아버지는 딸의 돈을 쓰는 것을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문지영은 아버지에게 억지로 떠맡기다시피 1000만 원을 건네주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 파이낸셜 설립 붐이 일어났다. 파이낸셜은 투자신탁과 대출을 하는 금융회사로 설립 붐이 일어나면서 많은 경리직 직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문지영도 한국파이낸셜이라는 회사에 이력서를 내어 취직이 되었다. 파이낸셜은 강남이나 종로, 광화문 등의 빌딩에 층 전체를 세내어 입주하여 겉으로 보기에 은행이나 다를 바 없는 종합금융회사로 보였다.
문지영이 하는 일은 단순 경리업무였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돈을 맡기면 통장을 만들어주고 월말이 되면 이자를 계산하여 지급하는 것이었다. 투자를 받는 것은 간부들의 일이었고 그녀가 하는 일은 대학 졸업자인데도 경리업무에 지나지 않았다.
‘석 달만 맡겨도 이자가 30%나 되잖아?’
문지영은 2000만 원을 맡긴 사람이 석 달 만에 2600만 원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1000만 원을 맡긴 사람은 석 달 만에 1300만 원을 찾아갔다.
‘은행은 1년 동안 1000만 원을 맡겨도 이자가 100만 원도 되지 않는데 석 달 만에 300만 원이면 굉장한 거야.’
문지영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에 아버지에게 주고 남은 돈 1000만 원을 투자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이자가 정확하게 들어왔다. 월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월급에서 쓰고 남은 돈까지 합쳐서 500만 원을 만들고 친구에게 1000만을 빌려 2500만 원을 다시 투자했다. 그런데 어느날 사무실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지더니 이자가 입금되지 않는다는 투자자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간부들이 회사의 경리 문제로 사정이 생겼으니 한 달만 기다리라는 답변을 하라고 경리부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경리부 직원들은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한 달만 기다려 달라고 고객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중역들이 한 사람도 출근하지 않았다. 투자금의 이자를 지급하라는 전화가 빗발치더니 원금을 내놓으라는 투자자들이 사무실로 몰려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과장이며 대리급 직원들이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다음에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중역실이며 사장실을 덮친 투자자들이 여직원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여직원들의 머리채를 끌고다니면서 마구 발길질을 했다.
“우리도 피해자들이에요.”
문지영은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떤 여자가 그녀의 블라우스와 브래지어를 잡아 찢었기 때문에 처녀인데도 젖가슴까지 허옇게 드러나고 말았다.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간신히 옷을 빌려 입고 사무실을 나왔다. 문지영은 친구에게 빌린 돈까지 모두 2500만 원을 자신이 다니던 한국파이낸셜에 맡겼으나 한푼도 건지지 못했던 것이다. 회사에 사기를 당한 것은 문지영뿐이 아니었다. 과장급에서 평범한 여직원까지 수많은 직원들이 적게는 1000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까지 날렸고 투자자들도 100억 원대에 이르는 큰돈을 날렸다. 회사 직원들까지 사기를 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대체 그 많은 파이낸셜은 어디로 간 거야?’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파이낸셜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문지영은 아직도 그것이 수수께끼였다. 친구 돈까지 날린 문지영은 그 돈을 갚기 위해 결국 술집 작부가 되었던 것이다.
<다음호부터 제3장 ‘검은머리 외국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