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익·최인철 씨와 그 가족들 30년 상처와 오해 풀어나가야…‘회복과 치유의 시간’
사소한 이유였다. 평소 같으면 웃고 넘어갈 만한 일이었다. 동생 성익 씨가 혼자 소주를 맥주잔에 가득 따라 마신 게 발단이었다. 동익 씨는 그렇게 폭음하면 몸도 상하고 다른 일행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마시는 건 실례라고 타일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성익 씨는 그 다음 말에 바로 언성을 높였다. 동익 씨의 혼잣말이었다.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렇게 변했나.”
“형이 나를 알아? 내 입장에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어? 나도 힘들었다고!” 성익 씨는 형을 똑바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동익 씨는 동생의 낯선 목소리에 당황했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형에게 말대답을 하지 않았던 착한 동생이, 자신을 향해 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동익 씨도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월 4일 부산고등법원에서 장동익 씨. 사진=고석희 기자
동생이 그날 왜 그랬는지는 한 달이나 지나서야 알았다. 성익 씨는 그날 말대답에 대한 ‘해명’ 대신 형이 복역하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려줬다. 성익 씨 삶의 초점은 형에게 맞춰져 있었다. 대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대신, 수사·재판기록을 복사하기 위해 어머니를 따라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을 돌고 복사집에 하루종일 앉아 있었다. 때로는 형수와 조카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해야 했고 직장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휴가를 내 형의 면회를 다녔다. 결혼 약속을 한 사람의 집에 인사를 하러 갔다가 형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헤어진 이야기도 차분히 들려줬다.
성익 씨는 그래도 형을 원망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형이 결백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게 자신의 운명과 같은 거라고 여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 차곡차곡 쌓여왔던 상처가 그날 그런 방식으로 터져 나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동익 씨는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자신의 시계가 1991년 11월 부산 사하경찰서에 끌려간 그날 멈춰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동익 씨에게 성익 씨는 여전히 담배도 모르고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스무 살의 어린 동생일 뿐이었다. 쉰 살을 훌쩍 넘겨 이제는 중년이 돼 버린 동생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다른 형제들과 아내, 딸이 떠올랐다. 다들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해왔다. 약 21년 복역 중 동익 씨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족들도 갇혀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동익 씨를 생각해 각자 겪고 있는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 짧은 면회 시간 동안 전해들은 이야기로 어림잡아 생각하고 상상한 게 전부였다. 서로 걱정만 하는 사이 오해와 상처가 쌓였다.
2013년 출소 이후에도 마주앉아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면회에서 전해들은 서로의 이야기와 그걸 토대로 상상했던 모습이 달랐지만 그대로 뒀다. 동익 씨와 가족에겐 재심이 전부였다. 무죄를 선고받고 누명을 벗으면 끝인 줄만 알았다. 30년간 각자 속으로만 삭여온 마음을 서로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떨어져 지내며 벌어질 대로 벌어져 버린 간극을 다시 메워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지난 2월 4일 부산고등법원에서 최인철 씨. 사진=고석희 기자
최인철 씨는 지난 1월 2일 장동익 씨 집을 찾았다. 선고를 앞둔 새해가 왔고, 단 둘이서만 술잔을 기울여 본 기억도 아득했다. 둘은 아내가 만든 반찬과 김치 위에 지난 이야기들을 얹어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인철 씨는 동익 씨를 앞에 두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동익 씨와 동생,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그날 전부 들었다. 인철 씨는 동익 씨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자신의 탓 같기만 했다.
인철 씨는 1991년 11월 부산 사하경찰서에 동익 씨보다 일찍 끌려갔다. 고문과 폭행 등 가혹행위를 더 먼저, 더 많이 받았다. 고통 끝에 수차례 정신을 잃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버티고 버텼지만 끝내 동익 씨와 함께 범행을 했다는 취지의 자백을 했다. 그럼에도 더 버텼다면, 하다못해 동익 씨가 공범이란 취지의 자백만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동익 씨에게 지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30년 전 한 마디 자백은 인철 씨도 모르는 새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죄책감이 됐다. 동익 씨는 물론 아내와 두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인철 씨의 아내는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92년 6월 남편처럼 구속됐다. 아내의 남동생이 “매형(최인철 씨)은 낙동강변 살인사건 발생 당시 대구에 있었다”는 취지로 법정에서 증언했는데, 이게 위증으로 몰렸다. 인철 씨 아내는 남동생에게 위증을 교사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아내는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하며 집을 지켰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악착같이 21년을 버텼다. 이제는 몸 어느 한 곳 멀쩡한 데가 없다. 두 귀는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큰소리를 내야 들릴 정도로 나빠졌고 눈도, 허리도, 무릎도 성하지 않았다. 다른 평범한 부부들처럼 함께 여행도 가고,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하고 싶지만 인철 씨 부부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30년 전 당시 ‘부곡하와이’에서 장동익·최인철 씨 가족. 사진=문상현 기자
동익 씨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가족들이 있어 괴로운 시간들을 참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잘못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런 동익 씨에게 미안하다. 인철 씨도 동익 씨와 가족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말한다.
2021년 2월 4일, 부산고등법원 형사1부(곽병수 부장판사)는 장동익·최인철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두 사람이 고통스럽게 21년을 보냈다고 판단했다. 무거운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인철 씨, 서로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동익 씨와 가족들,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30년간 차곡차곡 쌓인 상처와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없다. 예전의 가족, 친구의 그때 그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대신 동익 씨와 인철 씨, 그리고 가족들은 벌어진 간극을 그대로 덮어두진 않겠다고 말한다. 아파도 함께 아프고, 이겨내도 함께 이겨내 보란 듯이 ‘잘’ 살고 싶다고 했다. 길었던 법원의 시간이 끝나고 그들의 시계는 다시 돈다.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시작됐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