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김재범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10개월여 앞두고 급하게 체급을 81㎏로 올렸다. 단순히 이원희와 왕기춘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체급을 내리는 쉬운 방법이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해 김재범은 체급을 올렸다. 유도 선수가 체급을 올리는 것은 엄청난 도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김재범은 그 쉽지 않은 길에 발을 내디뎠고 단 10개월 만에 올림픽 은메달 리스트가 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유도 관계자들은 김재범의 은메달은 기적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김재범이 체급을 올릴 당시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81kg급 국내 최강자인 송대남의 존재였다. 81kg급에서 만난 김재범와 송대남의 피할 수 없는 승부는 2008년 5월 베이징올림픽 최종선발전에서 이뤄졌다. 터줏대감 송대남은 1, 2차 선발전에서 모두 김재범을 꺾으며 39점 대 37점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렇지만 최종선발전 결승에선 연장까지 혈투를 치른 뒤 판정에서 김재범이 승리를 거뒀다. 최종선발전은 배점이 1, 2차 선발전의 두 배인 까닭에 최종 점수에선 67내 63으로 김재범이 앞섰다. 나이를 감안하면 마지막 올림픽 도전이었던 송대남은 그렇게 체급을 올린 김재범에 밀려 올림픽 티켓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유도계에서 늘 비주류이던 송대남은 2008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생애 최고의 인연을 맺게 된다. 바로 유도 국가대표팀 정훈 감독과의 만남이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선수촌서 송대남을 만난 정훈 감독은 성실하고 착실한 그에게 매료됐다. 막내 처제와의 중매를 주선해 결혼을 성사시켜 동서지간이 됐을 정도로 정훈 감독은 송대남에게 매료됐다.
이듬해인 2009년 오픈 대회였던 파리그랜드슬램 유도대회에 정훈 감독은 이례적으로 김재범과 송대남을 동시에 남자 81㎏급에 출전시켰다. “둘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실제로 이들은 결승에서 만났고 송대남은 자신의 베이징올림픽 출전을 무산시킨 김재범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탁월한 기량을 가진 이들이 남자 81㎏급에서 계속 싸울 순 없는 일이었다. 정훈 감독은 은퇴를 고민하는 송대남에게 김재범처럼 한 체급을 올려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송대남은 90kg급에 도전하게 됐다.
정훈 감독은 이렇게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유도 대표팀의 윤곽을 확정했다. 73㎏급 왕기춘(24), 81㎏급 김재범(27), 그리고 90kg급 송대남(33)까지. 송대남은 이미 은퇴한 이원희 해설위원(31)보다도 나이가 많은 백전노장이다. 다시 말해 정말 그에겐 런던이 생애 마지막 기회였다.
유도 경기 때마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 정훈 감독은 송대남의 경기 땐 퇴장까지 당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선수에게 힘을 불어넣어줬다. 그만큼 송대남이 연장전 시작과 동시에 골든 스코어를 획득해 금메달을 확정지은 순간 가장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 역시 퇴장당해 관중석에 있던 정훈 감독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송대남은 정훈 감독에게 큰 절을 했다. 손윗동서인 정훈 감독은 맞절로 화답했다. 그 절은 자신에게 아내를 소개해줘 가정을 꾸리게 해주고 은퇴를 만류해 결국은 자신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만들어준 인생 최고의 은인에 대한 송대남의 진심어린 마음이었다. 시련과 좌절, 패기와 도전, 그리고 감동과 승리에 로맨스까지 갖춘 두 선수와 한 감독의 스토리다. 뭐 이 정도 스토리면 1000만 관객도 가능할만한 2012년 런던 올림픽 최고의 이야깃거리가 아닐까.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