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통 큰’ 결재 없인…‘발 꽁꽁’
“글쎄. (류)현진이야 원하겠지만, 팬들 입장에서 에이스의 유출을 어떻게 볼까 걱정이다.”
지난 2월. 한화는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그곳에서 만난 한화 고위 관계자는 류현진의 국외 진출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투로 이야기했다. 표면적 이유는 팬들의 반대였다. 이 관계자는 “한화에 류현진 만한 슈퍼스타가 없고, 원체 팬들이 류현진을 사랑하기 때문에 구단이 팬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류현진을 국외로 보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사견을 전제로 “류현진이 미 메이저리그로 진출하겠다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가야 한다”며 “한국 프로야구와 구단의 미래를 봤을 때 반드시 류현진의 국외 진출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역시 사견을 내세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을 거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는 이상훈, 구대성 등이 있지만, 30대 중반의 나이에 진출한 까닭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내년이면 26세인 류현진은 앞으로가 전성기인 선수다. 그만큼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만약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서 10승 이상을 거둔다면 한국 프로야구 위상과 한화그룹의 국제적 지명도도 굉장히 높아질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처럼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에 진출한다면 구단은 큰돈을 손에 쥘 수 있고, 이 돈을 팀 리빌딩 자금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다. 프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류현진의 국외 진출은 긍정적인 면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 지난 5월 16일 잠실야구장을 찾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류현진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실제로 김 회장의 말 한마디가 구단 운명을 바꿔놓은 예가 있다. 바로 김태균 영입이다. 지난해 8월 김 회장은 한화와 LG가 맞붙은 잠실구장을 방문했다가 “김태균을 영입해 달라”는 팬들의 목소리에 주먹을 불끈 쥐며 “김태균 잡아올게!”라고 답한 바 있다. 후폭풍은 화려했다.
이전까지 ‘가장 굼뜬 구단’으로 불렸던 한화는 김 회장의 한마디에 김태균 영입작전을 일사불란하게 진행했고, ‘구두쇠 구단’이란 세간의 평과는 달리 김태균에게 영입조건으로 100억 원을 안겼다. 류현진의 국외 진출을 바라던 이들은 김 회장이 다시 한 번 ‘통 큰’ 약속을 해주기만을 바란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
8월 16일 재계를 강타하는 대형 뉴스가 나왔다.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김 회장에게 징역 4년과 벌금 50억 원이 선고됐다는 소식이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는 회사에 수천억 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된 김 회장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에서 이처럼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김 회장을 법정구속하며 엄벌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집행유예가 예상됐던 터라, 한화그룹의 충격은 컸다. 문제는 이 충격이 고스란히 한화 구단에게까지 미칠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 구단 관계자는 “그룹 총수가 구속되면 구단의 모든 비전과 전략이 송두리째 바뀐다”며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당연히 소극적으로 구단 운영을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실례가 있다.
2007년 2월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이 회사 돈 횡령과 계열사에 끼친 손해 등의 혐의로 기소돼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자, KIA 구단의 색깔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만 해도 KIA는 FA 시장의 큰손이었다. 그러나 2008, 2009년엔 전력보강에 거의 돈을 쓰지 못했다. 2007년 5월 최희섭 영입 당시 모그룹 눈치를 살피느라 영입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구단 고위층이 발을 동동 구른 건 유명한 일화다.
2005년 7월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전까지 과감한 투자로 FA 선수들을 쓸어 모았던 삼성은 이 사건이 터지고서 몇 년 동안 FA 시장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당시 삼성 구단 관계자들은 “구단의 일상적인 투자마저 ‘돈성’이라 불리고 비판받을 수 있다”며 “따라서 최대한 몸을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룹 총수의 법정구속이란 최대의 악재에 봉착한 한화도 KIA, 삼성처럼 구단 운영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야구계가 “각종 비난 역풍에 시달릴 가능성이 다분한 류현진 국외 진출에 한화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예상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급박하게 흐르는 한화 사정과 관계없이 국외 구단들의 류현진 구애는 계속될 전망이다. 미 메이저리그 팀 가운데 최소 2개 팀 이상은 류현진을 영입 0순위로 꼽고 있다. 여기다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류현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류현진이 선발 등판한 8월 23일 문학 SK전엔 미국과 일본 구단 스카우트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그들은 연신 스피드건을 마운드쪽으로 들이대며 류현진의 속구 구속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끈 이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스의 스카우트였다. 오릭스 스카우트는 “류현진의 투구가 매우 인상적”이라며 “일본에서도 당장 통할 실력”이라고 극찬했다. 오릭스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대호가 뛰고 있다. 특히나 오릭스는 과거 한화 소속이던 구대성을 영입하며 한화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최고의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류현진 영입을 위해 비선을 가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류현진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실은 암울하기만 한 상황이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