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범죄조직 소탕’이란 명분은 열혈 은행원의 정의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인과 ‘의기투합’해 하룻밤을 함께 보낸 그는 다음날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녀가 지목한 계좌로 거액을 이체시켰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여인은 은행 상대 사기로 다져진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은행원이 치른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거액의 돈을 공중으로 날린 것은 물론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마저 쫓겨나게 된 것.
이렇게 되자 은행원은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애초 예금 유치를 위해 문제 여인을 만났고 사고금액도 전액 변제해줬으니 퇴직처리는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 2심 결과는 은행원의 패소. 사건은 이제 대법원으로 올라간 상태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전직 은행원. 상고심 재판부는 과연 그의 손을 들어줄까.
지난 98년 12월30일, 당시 대졸 3년차 은행원이었던 안명훈씨(가명)는 퇴근 무렵 낯선 여자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애초에는 옆자리 동료직원이 받던 상담전화였지만 통화가 길어지면서 그가 바통을 이어받은 것. 통화 요지는 ‘투자를 위해 거액의 예금을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퇴근 후에 커피숍서 만나
사실 자신은 FBI(미연방수사국) 소속 수사관이며 한국의 ‘권단원’이라는 이름의 환치기 조직원을 검거하기 위해 입국했다는 것이었다. 여인은 또 그의 은행계좌에 3억2천만원을 전산을 조작해 입금시켜 놓으면 이를 미끼로 체포할 수 있다는 계획을 털어놓았다. 요컨대 안씨에게 ‘수사협조’를 요청한 셈이었다.순간 안씨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한편으론 묘한 정의감 때문에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다.
안씨가 조심스레 “신분증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하자 정씨는 더 큰 덫을 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으로 가면 신분증과 관련서류를 보여주겠다며 집으로 안씨를 유인한 것. 정씨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집으로 간 안씨는 함께 양주를 마셨다. 가족사진이 눈에 띈 것도 그녀를 신뢰하게 된 한 요인이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안씨는 그녀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만다. 그 집을 빠져나온 것은 다음날 오전 6시.
간밤의 어지러운 기억들로 정신을 채 수습하기도 전인 오전 9시40분, 안씨는 또다시 정씨의 전화를 받았다. 머뭇거리는 안씨에게 그녀는 “입금하더라도 권단원을 체포한 뒤 바로 취소하면 될 것 아니냐”며 채근했다. 안씨는 “집주소도 알고 함께 밤까지 보낸 나를 믿지 못하겠느냐”며 재촉하는 정씨의 요구를 마지못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설마…속았다’
결국 통화가 끝난 오전 10시11분, 안씨는 그녀의 요구대로 권단원 명의의 계좌에 3억2천만원을 입금 완료했다. ‘문○○’이란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이 사람이 권씨에게 송금하는 방식을 취했다. 안씨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그 광경은 은행에 설치된 CCTV만이 말없이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하루종일 안씨는 좌불안석이었다. 계획대로라면 ‘FBI여성’은 작전이 끝난 뒤 곧바로 연락을 줘야 했다. ‘설마’하는 일말의 우려는 퇴근 시각이 임박했을 무렵, ‘속았다’는 체념으로 바뀌었다. 안씨는 일단 상사인 정아무개 과장에게 “32만원을 입금하려다가 키보드 조작 실수로 3억2천만원을 입금한 것으로 잘못 처리했다”며 허위로 보고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 과장은 이 사실을 다시 지점의 최종 결재권자인 홍아무개 지점장에게 보고했다. 은행측은 우선 사고 금액의 회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같은 은행 계좌였던 ‘권단원’의 계좌에는 아직 2억2천여만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문제는 이미 정씨가 텔레뱅킹으로 분산 이체를 완료한 약 1억원의 금액.
한편 이날 오전 10시께 안씨로부터 3억2천만원을 송금받은 정씨는 이 가운데 9천8백80만원을 이미 분산이체시켜놓은 상태였다. 각각 김아무개, 또 다른 김아무개, 박아무개씨 등의 명의로 개설돼 있는 세 군데 은행 계좌로 돈을 옮겨 놓았던 것. 그나마 텔레뱅킹의 하루 최대한도액이 1억원이었기에 더 이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FBI요원’ 정씨로서는 나머지 돈이 그림의 떡이었고, 안씨나 은행측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던 셈이다.
▶‘실수’ 거짓말 들통나
은행측에서는 이렇게 다른 은행으로 분산 이체된 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지점장이 직접 해당 은행들을 방문했다. 사고경위를 설명한 뒤 계좌이체된 금액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대 은행에서는 ‘예금주의 동의없이 반환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확인해줄 뿐이었다.
사고 금액에 대한 확인이 어느 정도 끝난 뒤 은행에서는 사고 경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일단 안씨가 말한 키보드 조작 실수에 대한 검증작업. 본사에서 급파된 검사부 직원들은 그날 오후 8시30분께 CCTV를 분석한 결과, 안씨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었다. 안씨의 주장대로라면 사고 발생 시각 화면에는 안씨 맞은편에 32만원을 입금 의뢰하는 ‘고객 문씨’가 등장해야 했다. 하지만 이 즈음의 CCTV 화면에선 안씨 앞에 아무도 없었다.
이쯤 되자 안씨는 정씨의 요구에 따라 3억2천만원을 입금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고 지점의 홍 지점장은 먼저 안씨의 부모에게 연락을 취했다. 사고 수습방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안씨의 부모는 회수되지 못한 약 1억원의 사고 금액을 즉시 변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은행측의 요청에 자신들과 안씨 이모의 아파트를 담보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안씨에게는 사고의 책임을 물어 사직서를 제출받았다.
훗날 문제가 커진 것은 바로 이 대목 때문. 정씨에게 사기를 당하고 은행에서 쫓겨나듯 퇴직한 안씨가 “사직 의사가 없었지만 지점장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한 것이므로 해고는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안씨는 은행측을 상대로 서울지법에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 1월25일 패하고 말았다.
안씨는 항소를 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민사19부)도 “진정으로 퇴직을 바라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의 상황에서 적절하다고 판단해 자발적으로 사직원을 제출했다 할 수 있으므로 원고의 주장은 이유없다”며 안씨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상고 막판 뒤집기
사고 당시 은행측은 안씨측에게 ‘유사한 금융사고의 경우 형사고발이 원칙인데 사직원을 제출하면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다’며 통상적인 사고처리의 원칙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안씨측도 이에 대해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재판부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던 것도 이런 정황 등을 사실로 인정했기때문 .거액을 유치하려는 직업본능과 국제범죄에 대한 묘한 정의감 탓에 묘령의 여인에게 너무나 쉽게 사기를 당한 안씨. 두 차례의 복직 소송에서 패소한 안씨측은 최근 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마지막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