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결과 박씨는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당신을 관리인으로 삼도록 하겠다’며 피해자들에게 접근해 각종 명목으로 수천만원을 가로챈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가 사칭한 신분은 옛 정권 실세 장관이던 M씨의 숨겨진 딸.
그녀는 교묘한 언변으로 당사자인 M씨마저 감쪽같이 속였다고 한다. 지난 11월25일 경찰에 검거되기까지 8개월간 그녀가 벌인 신출귀몰한 사기행각을 추적했다. 박씨는 ‘속이기’ 전문가였다. 연이은 사기행각으로 지난 98년 교도소를 들락거린 전력이 있었다. 박씨의 이번 사기극은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그곳에서 잉태됐다.
이를 철썩같이 믿은 이씨는 급기야 자신의 시동생인 김준환씨(가명•45)에게 박씨를 소개시켜주게 된다. 박씨의 전력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김씨는 그녀를 그저 돈 많은 집의 딸 정도로 알 수밖에 없었고, 둘은 지난 99년 8월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생활을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얼마간 평범한 삶을 살았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생활에 쪼들려 살고 있던 집마저 처분한 채 여관을 전전하기에 이른 지난 3월.
이 무렵부터 박씨는 다시 사기극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가쪽과 재산분쟁을 겪고 있다’고 둘러대는 박씨를 남편 김씨는 그저 안쓰럽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박씨가 사기극에 동원한 레퍼토리는 남편 김씨를 속였던 내용과 비슷했다.
자신이 과거 정권의 실세로 이름을 날렸던 M 전 장관의 숨겨진 딸이며 그로부터 수천억원의 재산을 상속받았다는 것. 사람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관리인으로 채용하겠다’며 미끼를 던진 뒤 법원등록비 등 갖가지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방식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이 같은 수법으로 지난 8월22일 경기도 성남의 한 여관에 투숙하면서 업주 윤한진씨(가명•43)로부터 3천만원을 받아내는 등 모두 14명으로부터 27차례에 걸쳐 4천여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에게 속은 것은 ‘재산관리인’이란 자리에 현혹됐던 피해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박씨가 세 과시를 목적으로 고용한 무려 10여 명의 ‘경호원’들 역시 그녀에게 감쪽같이 속고 말았다. 박씨는 커다란 가방을 갖고 다니며 현금을 가득 채운 것처럼 위장하는가 하면 항상 최고급 에쿠스 승용차를 빌려 타고다녀 주변으로부터 ‘귀한 집 딸’로 공인받았다.
박씨의 가짜 신분을 더욱 공고히 해준 것은 항상 그녀의 주변을 지키던 검은색 정장차림의 경호원들. 한 경호단체에 소속돼 있던 이들은 ‘나를 경호해 주면 거액의 연봉을 주겠다’던 박씨의 달콤한 유혹에 속아 그녀의 뒤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박씨가 피해자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라고 속인 M 전 장관 역시 그녀에게 철저히 속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파악한 정황은 이렀다. 박씨는 지난 9월 중순 경기도 분당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던 이명현씨(가명•여)에게 접근했다.
이씨의 남편은 당시 달리 직업이 없었지만 과거 20여년간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던 경험의 소유자.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바깥양반이야말로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이씨의 남편을 자신의 재산관리인으로 채용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 과정에서 이씨에게 “경호원들의 회식 비용이 필요하다”는 등의 명목으로 수 차례에 걸쳐 4백여만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몇 차례 박씨에게 돈을 건넸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어 답답해하던 이씨가 그녀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보여줄 수 있겠느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던 것. 그러자 박씨는 지난 10월28일 대담하게도 M 전 장관의 사무실로 그녀를 데려갔다.
이씨를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게 한 박씨는 M 전 장관을 만나서는 그가 운영하고 있던 재단에 50억원 상당의 기부금을 출연하겠다는 식으로 대화를 하며 위기를 넘겼다. M 전 장관으로서도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재단으로 찾아온 박씨를 의심하기란 어려웠다.
이날 오후 M 전 장관에게 1차로 얼굴을 알린 박씨는 저녁 무렵, 이번에는 피해자 이씨를 데리고 M 전 장관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집 안으로 들어간 박씨. 이씨는 집 앞에서 그녀가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뒤 박씨는 M 전 장관과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나왔다. 한 손에는 M 전 장관의 부인이 쓴 책까지 들고서. 이씨의 원래 목적은 M 전 장관과 직접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는 의심을 접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처럼 대담한 사기 행각을 이어가던 박씨도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이 실제로 M 전 장관을 찾아갈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비 재산관리인’들은 물론 자신의 남편, 경호원, 심지어 전직 장관까지 마음껏 농락했던 박씨는 결국 이 피해자의 신고로 사기 행각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