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근원지는 에이즈에 감염된 두 남자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지난 11일 서울 중랑경찰서는 동성애자 사이트에서 만난 ‘동료’를 살해한 혐의로 조병묵씨(가명•25)를 검거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자신이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 데 불만을 품고 지난 6일 홍명진씨(가명•42)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사건은 이 두 사람이 에이즈 감염사실을 숨긴 채 다른 동성애자들은 물론 여성들과도 빈번한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밝혀지자 또 다른 괴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에이즈 공포를 떠올리게 만든 이번 사건의 진상을 추적했다.
▲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 조씨. | ||
에이즈 감염자라는 사실도 그의 운신에 걸림돌이 됐다. 농촌마을인 고향을 떠난 것도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계속 지방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한 탓에 서울에 친구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에게는 이반들의 사이버 사랑방 역할을 하던 ○○○○가 세상을 향한 거의 유일한 창구인 셈이었다. 이날도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를 품고 이 사이트에 입장한 조씨. 아주 특별한 제목의 방이 그의 눈에 띄었다.
‘아무개 - 이 사람은 에이즈다.’ 순간 조씨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개란 다름아닌 자신의 아이디였다. 설마하는 마음에 방을 만들어 놓은 방장에게 인터넷 메시지를 보냈다. ‘누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말입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슬며시 방에 입장한 조씨는 채팅방에서 오고가는 대화내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사람이 대화명을 바꾸더라도 개인정보를 클릭하면 신상에 관한 정보가 공개될 것.” 분명 방 안에서 오고가는 신상명세는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조씨 스스로는 에이즈라는 질병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않으려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에이즈란 병이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함께 동거하고 있던 두 남자친구에게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동안 철저히 비밀에 부쳐온 탓에 조씨가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것은 부모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바로 한 달여 전 역시 ○○○○에서 만난 홍명진씨.
홍씨를 알게 된 것은 지난 11월 말께였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유난히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던 홍씨에게 조씨는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 채팅이 이뤄지면서 조씨는 급기야 홍씨에게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떠올려보면 자신이 에이즈 감염자란 사실을 누가 퍼뜨린 것인지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홍글씨’가 새겨진 문제의 그날 이후 이뤄진 홍씨와의 채팅은 그 추측을 확신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에서 에이즈 환자로 낙인찍힌 그날 이후 조씨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숨긴 채 홍씨와 채팅을 시도했다. “형이 내가 에이즈라고 사람들에게 말한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홍씨가 늘어놓은 변명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로부터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6일 조씨는 마침내 홍씨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가 홍씨를 찾은 데는 원한 이외의 다른 목적도 있었다. 일정한 직업 없이 지내는 동안 카드빚이 수백만원대에 이르렀던 것. 이참에 조씨는 평소 채팅에서 돈이 많다는 사실을 과시하던 홍씨에게 금품을 빼앗을 요량이었다.
에이즈 감염사실을 폭로한 데 대한 분노와 카드빚에 대한 중압감을 안고 홍씨를 찾은 조씨, 이와는 반대로 그가 단순히 자신을 보고 싶어 찾아온 줄 알고 흔쾌히 맞아들인 홍씨. 같은 방에 서로 다른 목적을 품고 마주한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간 대화가 오고간 끝에 조씨가 마침내 흉기를 휘둘렀던 것. 홍씨를 살해한 뒤 집을 빠져 나온 그는 그로부터 5일이 지난 11일 홍씨의 신용카드를 이용해 4백여만원을 인출한 것이 빌미가 돼 결국 경찰에 붙잡혔다.
한편 경찰서에서 만난 조씨는 “처음 홍씨를 찾아갔을 때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반항이 워낙 심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향에 계신 어머님 건강이 좋지 않으신데 나같은 자식은 빨리 잊고 지내셨으면 좋겠다”며 고개를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