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새벽 1시경.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의 한 단독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19 소방대가 출동해 진화에 나섰고 자욱했던 연기가 걷히자 방에 쓰러져 있던 한 중년 여성이 발견됐다. 그러나 사인은 화상이나 질식사가 아닌 자상(刺傷). 날카로운 칼로 수 십여 군데가 찔려있었고 주변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살해된 김씨의 남편은 다름 아닌 부산 모 경찰서 형사계의 박아무개 계장으로 밝혀지면서 경찰측은 아연 긴장했다. 경찰에 앙심을 품은 범죄조직의 보복 살인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 발생 이틀 만에 결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경찰이 참고인 조사를 위해 아들을 불러 조사를 하던 중 그로부터 “술에 취해 잠을 자고나서 일어나 보니 손에 칼이 쥐어져있고 어머니가 죽어있었다”는 진술을 들은 것이다. 이어 그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했다. 경찰은 그 즉시 미란다원칙을 고지하며 현장에서 긴급체포했다. 조사 결과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부산 모 대학 법학과를 다니던 중 휴학을 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박씨는 평소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밤 늦게 귀가하곤 했다. 그날따라 술이 먹고 싶었던 그는 어머니인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통닭과 술을 사갈 테니 마시자”고 말했다. 술은 백세주와 소주를 섞은 소위 ‘오십세주’로 시작했다. 어머니는 맥주 1병에 백세주 한 잔 정도만을 마셨으며 거의 대부분의 술은 박씨가 마셨다. 이날 마신 술은 맥주 1병과 소주 1병, 그리고 백세주 3병이었다.
일부에서 알려진 바로는 이날 술자리에서 아들 박씨와 어머니 김씨가 말다툼을 했다고 전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전언. 아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만큼 학업과 취업에 관한 말들이 나왔으며 그 수위 역시 ‘그저 모자지간에 흔히 할 수 있는 이야기’ 정도였다는 것. 술을 다 마신 후 아들 박씨는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자겠다고 했고 김씨는 아들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후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어 부엌으로 간 박씨는 칼을 들고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복숭아는 없었고 그냥 칼만 손에 든 채 다시 안방으로 왔다고 한다. 그리곤 다시 잠이 들었다는 것. 그가 잠에서 깨었을 땐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상태. 당황한 박씨는 ‘불을 질러 이 상황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샤워를 한 뒤 일회용 라이터로 이불에 불을 붙인 후 황급하게 집을 빠져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인근의 한 PC방. 인터넷에 접속한 박씨는 여자 친구에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한 통의 이메일을 썼다. ‘술을 깨고 보니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어이없다.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평소 술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조금씩 고쳐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렵다’
두 번째 의혹은 박씨가 “살해 당시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의자 박씨는 평소에도 술을 마시면 길가에 있던 자동차 사이드미러를 부수기도 했고 낯선 곳에서 잠이 든 적도 있었으며 다음날 전혀 기억을 못했다는 것이 주변의 증언이다. 의학적으로는 이를 ‘블랙 아웃(Black Out)’으로 부르고 있다. 술에 만취하게 되면 흔히 ‘필름이 끊긴다’고 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아무리 블랙아웃의 상태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특히 살해된 김씨는 등과 복부, 가슴에 47번이나 찔린 채 살해됐다. 중요한 것은 상처 자국 중에 갈비뼈 사이를 뚫고 들어간 칼자국이 많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이는 전문적으로 칼을 쓰는 것을 배운 사람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없는 잔혹한 살해 수법. 과연 무의식 상태에서 이처럼 예리한 칼솜씨를 부리며 자신의 친모를 살해할 수 있느냐는 것도 의문이다.
경찰은 용의자 박씨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버지 박 계장 역시 “평소에 약간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정신과에 데려가 치료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20여 년이 넘게 경찰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범죄와 정신질환자에 의한 사건들을 목도해왔던 형사계장이라는 사람이 정작 자기 아들의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안이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는 것.
용의자 박씨 역시 4년제 대학 법학과를 들어갈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여자친구도 사귀었다는 점에서 일상생활에서의 심각한 정신적 이상 징후를 살펴보기 힘들다. 수사 담당 형사 또한 “조사 과정에서 말투나 행동, 눈빛 등을 봤을 때 정신질병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상을 종합해보자면 ‘가정에 문제가 없고 전과나 특정한 정신병 이력도 없는 한 취업준비생이 술을 마신 후 예리한 칼솜씨를 발휘해 이유도 없이 어머니를 47번이나 찔러 살해했다’는 모순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경찰 주변에서는 조심스럽게 두 가지의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첫 번째는 역시 보복살해의 가능성이다. 박씨의 주벽과 심각한 블랙아웃 증상을 알고 있던 제3의 인물이 살해를 한 후 잠자고 있던 박씨의 손에 칼을 쥐어준 채 도주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박씨 가족 내의 어떤 복잡한 사정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 실제 이들 모자지간의 나이차는 20년밖에 되지 않는다. 가족들만 알 수 있을 어떤 내밀한 살해동기를 가진 박씨가 용의주도하게 어머니를 살해한 뒤 법망을 피하기 위해 학창시절에 배웠을 만한 법지식을 동원, 일관되게 ‘기억이 없다’는 진술을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경우를 두고 법적으로는 ‘심신상실’, 혹은 ‘심신미약’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이 경미하고 때론 무죄판결까지 받을 수 있다. 한 법학도가 지어낼 수 있는 최고의 ‘완전범죄 시나리오’인 셈이다. 현재 경찰은 “잠재의식 속의 어떤 부분이 살해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며 “아직 조사할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살해동기를 찾아내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할 것이다”고 말했다. 아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어머니의 죽음. 당시의 처절했던 절규는 끝내 메아리쳐져 그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부산=이남훈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