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4일 저녁 대구지방경찰청 여성계 사무실에서 한 중년 여성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현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녀는 올해 서른여덟 살의 박아무개씨였다. 어디를 보아도 범죄와는 관련없을 듯한 평범한 주부였다. 이날 밤 박씨가 싸늘한 경찰청 수사실에서 목놓아 울부짖게 된 것은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범죄에 희생된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마수에 걸려 몸과 재산, 그리고 가족마저 모두 잃고 말았다. 이 주부가 겪은 4년 동안의 악몽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박씨의 비극이 시작된 것은 지난 99년 2월 이아무개씨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이씨는 박씨보다 한 살 위였다. 박씨가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은 동네 친구이자 계모임을 함께 하던 김아무개씨(여·40)의 소개 때문이었다. 당시 동네 친구인 김씨는 박씨에게 “자신의 남자 친구”라며 이씨를 소개를 했다. 이씨는 그 후 ‘꽃집을 한다’며 박씨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박씨가 자격증까지 보유한 꽃꽂이 마니아였던 탓에 박씨와 이씨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만난 지 한 달쯤 뒤인 지난 99년 2월 말 경주로 꽃구경을 갈 정도로 친해졌다. 경주행을 제안한 사람은 물론 이씨였다. 박씨는 아무런 의심없이 이씨와 동행했다.
그러나 이씨의 마음속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검은 마수가 꿈틀대고 있었다. 박씨의 남편이 대구에서 유명한 학원 강사인 데다, 재산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이씨는 호시탐탐 박씨를 수중에 넣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이씨를 따라나선 박씨. 그러나 이씨의 마각은 경주에 도착하는 순간 본색을 드러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술을 한잔 걸친 이씨는 “좀 쉬었다 가지”하며 이글대는 눈길로 박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박씨가 차를 빠져나오려 했지만 이미 야수로 돌변한 이씨의 손을 벗어나기엔 때가 늦었다.
이씨는 박씨를 인근 여관으로 끌고 들어갔다. 여관 방문을 닫자마자 이씨는 흉기를 들이대며 강제로 박씨를 성폭행하고 알몸사진을 찍었다. 놀란 박씨가 사진기를 뺏으려 발버둥쳤지만 남자의 거친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 차례 관계를 맺은 뒤 이씨는 박씨에게 “입을 열면 이 사진들을 남편 학원에 뿌려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씨의 마수는 더욱 거세졌다. 이씨는 수시로 박씨로부터 돈을 뜯어냈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녀를 불러내 성관계를 맺었다. 그는 성기속에 맥주병을 집어 넣는 등 변태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씨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나 주위의 눈이 두려워 병원조차 찾지 못했다.
이씨는 박씨가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몰래 히로뽕을 먹이기까지 했다. 미리 준비한 음료수나 물에 히로뽕을 타 박씨에게 마시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성폭행을 당할 때면 으레 환각상태에 빠졌으나 그저 환각제 정도라고 여겼을 뿐이다. 이씨의 돈 요구도 갈수록 대담해졌다. 당초 한번에 5백만원 정도를 요구하다 나중에는 수억원대로 단위가 커졌다. 이씨는 박씨로부터 받은 돈으로 대구 시내에 33평, 47평 아파트를 두 채나 매입하고 고급 승용차를 다섯 차례나 바꾸는 등 한몫을 단단히 챙겼다.
2000년 5월에는 박씨가 준 1억원으로 꽃집을 차리기도 했다. 박씨는 2002년 5월 무렵 남편에게 “증권사 간부의 도움을 받아 주식 투자를 하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고 지인들에게 14억원을 빌려 고스란히 이씨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경찰조사 결과 박씨가 이씨에게 ‘4년간’ 건넨 돈은 무려 17여 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2002년 11월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한 박씨는 채무자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이때 이씨는 혹시 자신이 간통죄 등으로 걸려들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박씨에게 남편과 이혼하라고 요구했다. 박씨는 치를 떨면서도 이씨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씨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결국 박씨는 채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지는 바람에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래도 이씨의 요구는 계속됐다. 그는 태연하게 박씨를 면회하면서 “입을 열면 애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지난 2003년 8월 만기 출소한 박씨.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남편과 자식들도 모두 떠났고, 끼니를 때울 돈은 물론 잠잘 곳도 없었다.
결국 박씨는 더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지난 8월 대구지방경찰청 여성계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수사에 들어간 경찰은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 9월14일 이씨를 마약류 관리, 사기, 폭력 행위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4년 동안 자행된 이씨의 상상할 수 없는 파렴치극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이씨에게 피해를 본 여성은 박씨뿐만이 아니었다. 이씨를 박씨에게 소개해준 김씨가 첫 피해자였던 것이다. 결국 박씨는 이씨에게 시달리다 못한 동네 친구 김씨가 떠넘긴 ‘폭탄’을 쥐게 된 꼴이었던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는 유부남이었고, 대구 A아파트 일대에서 일을 하던 이동 세차원이었다. 그러다 지난 97년 우연한 모임에서 김씨를 만난 이씨는 그녀의 매력에 마음을 뺏겼다. 이씨는 ‘꽃집을 하는 총각’ 행세를 하며 김씨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몇 차례 만나던 김씨와 이씨는 지난 98년 3월 무렵 저녁에 술자리를 가지게 됐다. 두 사람의 관계가 복잡해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씨는 얼큰하게 술이 취한 김씨를 여관으로 끌고가 욕구를 채웠고 이를 미끼로 김씨에게 돈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당초 “생활비를 달라”는 아내의 등쌀과 카드 연체금 독촉을 못 이겨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됐다. 그 후 이씨는 김씨에게 “남편에게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다섯 차례에 걸쳐 모두 6천만원을 빼앗았다. 김씨는 이씨의 협박에 못이겨 사채까지 끌어대는 바람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이로 인해 도배업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김씨의 남편은 자살하고 말았다. 짐승과도 같은 이씨의 마수로 인해 평범한 가정이 파탄나고, 죄없는 남편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