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 피트 ‘졸리 얼굴 가물가물?’
어느 날 길을 걷는데 아는 사람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다가섰는데 그 사람이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쌩 지나가버린다면? 아니면 눈이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람인양 그냥 지나친다면? 아마 이런 경우에는 십중팔구 무시당했다는 기분 때문에 불쾌할 것이다. 혹은 화가 나서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 어쩌면 그 사람은 무례한 것이 아니라 정말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안면실인증’ 혹은 ‘안면인식장애’를 겪고 있는 경우라면 말이다.
브래드 피트는 “지인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로 인해 거만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고 고백했다. 전 세계 인구 중 2~3%가 브래드 피트처럼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으며 가족까지 몰라보는 경우도 있다. 브래드 피트(작은 사진)와 부인 앤절리나 졸리.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 2013년 배우 브래드 피트는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분 나빠했다. 사람들한테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말해달라’고 하면 오히려 더 불쾌하게 여겼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내가 이기적이고 거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안면실인증은 간단히 말해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이미 몇 번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물론이요, 친한 친구나 직장 동료, 매일 보는 배우자나 자녀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거울이나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증상은 보통 얼굴에 대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목소리나 걸음걸이, 헤어스타일은 기억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미국 심리수사 드라마인 <퍼셉션>에서는 안면실인증을 겪는 등장인물이 집에 침입한 도둑을 알아내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인물은 도둑의 얼굴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도둑이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 모양이나 목소리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도둑의 태도만 보고도 범인을 정확히 지목했다.
하지만 안면실인증이라고 해서 얼굴 형태가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얼굴이 보이긴 하지만 단지 뇌에서 정보를 저장하지 못해서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한 번 만났던 사람을 다음에 다시 만날 경우에 알아보지 못하는 식이다.
이에 대해 독일 밤베르크대학의 인지심리학자인 클라우스-크리스티안 카르본 교수는 유럽 사람이 일본이나 중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겪게 되는 일을 예로 들었다. “사실 일본이나 중국 사람들은 개개인마다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럽 사람들은 이들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피트 외에도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유명인사들은 또 있다. 스웨덴의 왕세녀인 빅토리아 공주도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때때로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특히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야 하는 공식석상에서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영국의 백만장자 사업가이자 TV 방송인인 던컨 배너타인도 마찬가지다. 수년 전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안면실인증을 고백했던 그는 “두 시간 동안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네 시간 후에 저녁 약속 자리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났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했었다”라고 자신의 일화를 소개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지난 10년간 본머스대학에서 안면실인증을 연구해온 세라 베이트 심리학 교수는 “전 세계 인구 가운데 2.5%가량이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경우에는 수천 명이, 그리고 독일의 경우에는 200만 명가량이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생각보다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안면실인증을 겪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이 이런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내가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면실인증의 원인은 뭘까. 유전에 의한 선천적인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인 것일까. 또는 생리적인 문제일까, 아니면 심리적인 문제일까. 베이트 교수에 따르면 안면실인증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유전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겪는 선천적인 경우와 훗날 외상, 뇌졸중, 퇴행성 등 뇌손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후천적인 경우가 그것이다. 확실한 것은 안면실인증이 시각장애나 지능이 낮아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면실인증의 증상은 정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령 얼굴은 알아봐도 이름을 기억하는 데 애를 먹거나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기도 한다. 또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을 식별하지 못하거나 나이 혹은 성별을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직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낭패일 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일자리를 구할 때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보통 직장 동료나 고객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일을 찾게 된다.
또한 베이트 교수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증상을 겪는다. 이런 증상 때문에 가족들 사이에서 놀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안면실인증에 대해서는 현재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 현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가령 사람들의 걸음걸이나 목소리, 특정한 옷차림, 헤어스타일로 알아보는 식이다.
교사들의 경우에는 교실에서 학생들이 앉는 순서를 정해 놓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미리 동료나 친구, 가족들에게 만날 때마다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해놓기도 한다. 조감독인 사라(가명)라는 여성의 경우에는 현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옷장에 걸린 동료들의 외투와 신발을 살펴본다. 누가 먼저 도착해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일부러 먼저 인사를 건네 상대가 자신을 알고 있는지 살핀다. 그녀는 “말을 시켜 목소리를 들으면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안면실인증을 고백한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이렇게 부탁해 놓기도 했다. “만일 갑자기 우리 집을 찾아와야 할 때에는 현관 앞에서 윙크를 하거나 휘파람을 불거나 아니면 네가 누구인지 먼저 꼭 말을 해줘.”
이런 까닭에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말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이는 특별히 사교적인 성격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부러 상대와 말을 많이 해서 대화 속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베이트 교수는 “이런 방법들은 대부분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교복을 입거나 엄격한 교내 규율을 따라야 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현재 안면실인증의 연구는 초기 단계에 불과한 것이 사실. 아직 이렇다 할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며, 때문에 앞으로 밝혀야 할 것 또한 많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안면실인증’의 놀라운 비밀 이들 중엔 ‘언어 천재’ 많다 2004년부터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안면실인증을 연구하고 있는 마르티나 그뤼터 박사는 이 분야에서 선구자격인 인물이다. 지금까지 그뤼터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의 안면실인증은 유전적으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피실험자 700명 가운데 안면실인증을 나타낸 12명을 대상으로 이들의 가계도를 조사한 결과, 모두 친인척 가운데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눈동자 색깔, 혀말기 등과 같은) 단일유전자장애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그뤼터 박사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안면실인증을 나타낸 어린이와 청소년들 가운데에는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가령 언어적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거나 말솜씨가 뛰어나거나 혹은 두뇌회전이 빠르거나 독특한 개성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뮌스터대학의 잉고 켄너크네흐트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도 비슷한 조사를 실시했다. 아이큐 130 이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의 회원들 가운데 25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10~15%가 안면실인증 증상을 나타냈다. 켄너크네흐트 교수는 “놀랍게도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안면실인증과 비슷한 증상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노벨상 수상자, 검사, 판사, 국회의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밤베르크대학의 카르본 교수는 “안면실인증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언어 영역의 아이큐가 상당히 높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특별히 언어 능력이 필요한 곳, 가령 출판사 같은 곳에 근무하는 사람들 가운데 안면실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덧붙였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