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9일 실종된 박양은 다음날 옷가지와 소지품만 발견됐다. 경관이 가리키는 곳에 박양의 옷과 휴대폰 등이 있었다. | ||
10월9일, 11월10일 한 달 간격으로 같은 학교 여고생의 실종, 살인사건이 벌어진 천안에서는 요즘 ‘천안 괴담’이 흉흉하게 퍼지고 있다. 두 사건 모두 귀가길의 여학생에게 일어난 일이다 보니 밤늦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는 시간에는 학교마다 학부모들이나 독서실, 학원에서 대기하고 있는 차들로 장사진을 이룰 정도다.
더구나 시신으로 발견된 이아무개양(17·B여고 2학년)의 경우 자신이 사는 아파트 건물에서 변을 당했다. 때문에 학부모들은 밤늦은 시간 귀가시 학원 차량이 자녀들을 아파트 단지 입구가 아닌 현관 입구까지 내려다주지 않을 경우 학원 수강을 끊겠다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수진양(16)이 실종된 지 50여 일이 흘렀고, 이양이 살해된 지 20여 일이 지나고 있지만 범인의 윤곽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지난 10월22일 밤늦게 귀가하던 또 한 명의 여고생(3학년)이 성폭행 당할 뻔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민들의 ‘공포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과연 두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혹시 동일범은 아닐까. 이들 사건을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전혀 없는 걸까. 사건의 현장을 되짚어 보았다.
박양 10월 9일 박양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실종 당일인 10월9일 오후 2시50분 박양의 학교 안 느티나무 벤치에서였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이날 12시30분께 교문을 나선 박양은 여러 차례 학교 안팎에서 목격됐다. 학교 앞 골목이나 교내 화장실에서 모습을 보였다. 오후 1시7분에는 학교 인근의 Y백화점 앞에 잠시 머물렀고 1시30분에는 학교 앞 서점에 들어와 강아지를 만지며 놀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양은 가방을 놓아두고 강아지를 들고 서점 뒷문으로 나갔다가 한참 후 다시 들어오기도 했다. 서점 주인은 그런 박양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다.
오후 2시40분쯤에는 박양이 학교 교실 안에 있는 모습이 경비원에게 발견됐다. 당시 교복치마에는 먼지가 묻어 있어 잠긴 교실 문 대신 창문으로 넘어 들어온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잠시 뒤 박양은 교정의 느티나무 벤치 앞에서 혼자 서성거리다 “집에 가라”는 경비원의 채근을 듣기도 했다. 이것이 박양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박양의 어머니는 딸의 귀가가 늦자 오후 2시30분부터 9시까지 몇 차례에 걸쳐 박양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밤 11시 동네 독서실을 뒤져도 박양이 보이지 않자 결국 박양의 부모는 다음날 새벽 1시30분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처음에는 단순히 귀가가 늦은 경우나 가출로 보았다. 그러나 다음날 오전 10시30분 학교에서 2km 떨어진 성정동 번화가 뒤편 주택가에서 박양의 옷과 소지품이 발견되자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현장’에는 박양의 교복뿐만이 아니라 속옷과 머리핀, 휴대폰, 가방, 안경 등이 흩어져 있었다. 특히 속옷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박양이 누군가에게 위해를 당하고 끌려갔을 가능성이 점쳐졌다.
당시 속옷은 물에 빤 듯 젖은 상태였다고 한다. 수초 같은 것이 묻은 것으로 보아 깨끗한 물이 아닌 개천에서 빤 것으로 보였다. 범인이 박양을 개울가로 끌고가 성폭행한 뒤 속옷에 묻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물로 씻어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일단 경찰은 속옷에 묻은 풀과 신발에 묻은 모래가 있는 장소를 찾아 백방으로 뛰었다. 천안 인근 광덕산, 봉서산, 대로산과 천안천, 평택천, 장서천에서 수풀과 모래의 샘플을 채취해 비교해봤으나 일치하는 장소를 찾지는 못했다.
박양의 속옷이 발견된 장소는 하수구 뚜껑이 있는 곳. 혹시 박양이 하수구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한 경찰은 하수구를 내시경으로 수색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직접적인 단서가 나타나지 않자 경찰은 박양 주변을 다시 훑기 시작했다. 사실 당일 박양의 행적을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수업을 마친 뒤 홀로 학교 밖을 서성거리다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온 것, 학교 앞 서점에 들어가 개를 돌보다 뒷문으로 사라진 뒤 한참 뒤에 나타난 것, 창문을 넘어 다시 교실로 들어간 점 등이다. 박양은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 박양과 이양의 수사본부가 설치된 천안 백석파출소. | ||
물론 박양이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학교 안팎을 오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휴대전화 통화 내역을 분석한 결과 당일 박양은 누구와도 통화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박양이 혼자서 학교 주위를 서성였던 것은 성격 때문일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평소에도 대학생들이 읽을 법한 철학책을 읽는 등 박양이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졌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주변에서는 실종 당일 학교에서 감상문을 쓰기 위해 보여준 영화 <가타카>가 박양의 심정에 큰 변화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완벽하게 살며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한다. 박양도 이런 내용에 자극을 받아 열등감을 가진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옷들을 버리고 사라진 것이 아니냐는 것. 또한 일각에선 부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출을 했을 경우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아무리 기존의 자신의 모습을 버린다고 해도 안경까지 버릴 수는 없기 때문.
실제 경찰은 박양이 안경을 새로 맞췄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천안 시내 안경점을 샅샅이 탐문했으나 박양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또 당시 박양은 현금 3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잠적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액수다.
그렇다면 박양은 결국 범죄 피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경찰은 누군가가 박양을 납치한 뒤 옷을 갖다버렸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범인은 왜 박양의 옷을 내다버린 것일까.
경찰은 범인이 박양을 끌고가 성폭행 후 살해하고는 시신을 유기하려다 시신이 발견될 경우 박양의 속옷에 묻은 자신의 흔적이 드러날까봐 속옷을 벗겨 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추정에 따르면 범인은 벗긴 옷을 시신에 다시 입히기가 곤란하자 야밤에 몰래 옷을 갖다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속옷이 버려진 장소가 인적이 없는 곳이 아니라 주택가라는 점은 범인이 당시 급하게 뒷수습을 하려고 했거나 술에 취했을 가능성을 점치게 하는 대목. ‘급하게 수습’을 한 것이라면 범인이 일부러 먼 곳까지 와서 버렸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때문에 경찰은 박양의 소지품이 발견된 곳 주변에 범인의 행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고 탐문을 계속하고 있다.
이양 11월 10일 박양이 실종된 지 한 달 후인 11월10일 아침 박양과 같은 여고 2학년 학생인 이아무개양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뒤편 후미진 곳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양은 전날 밤 독서실에서 귀가하던 길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먼저 피해 당일 이양의 행적을 살펴보자. 이날 이양은 전날 모의고사를 친 후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선배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Y백화점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갔다. 귀가 후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이양은 밤 10시30분 평소 다니던 독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양의 집에서 약 3백m 떨어져 있는 이 독서실은 공터가 많고 가로등이 없는 후미진 곳에 자리해 있었다. 때문에 독서실측은 정해진 시간에 차량으로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난 날이라 학생들이 거의 없었고 이양은 평소와는 달리 밤 12시51분 홀로 독서실을 나섰다. 독서실은 전자식으로 입실, 퇴실을 등록하게 돼 있어 이양의 퇴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음식점을 하는 이양의 부모는 밤늦게 들어와 이양이 집에 있는 줄로만 알고 그냥 잠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아침 7시에서야 딸이 사라진 사실을 알고 독서실과 학교를 뒤지며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양은 이날 아침 9시19분 자신이 사는 아파트 같은 동 뒤편 공터에서 경비원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이양의 시신은 하의가 완전히 벗겨지고 피가 흥건히 묻은 상태였다. 하의는 이양의 사체와 함께 발견됐으나 이양의 휴대폰과 가방은 주변에 없었다. 이양은 목 왼쪽 경동맥이 칼에 찔려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얼굴 왼쪽에 맞은 흔적과 칼자국이 남아 있었고 오른쪽 엄지 손가락이 칼에 베어 있었다. 음부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얼굴과 손가락의 상처로 보아 이양이 범인에게 극렬하게 저항하다 사망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양이 발견된 공터 근처 샛길에선 핏자국 6개가 발견됐다. 범인이 이양을 근처에서 성폭행하고 칼로 찌른 후 이곳에 버려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이양의 시신이 발견된 아파트 한 켠. 이양이 살던 곳이라 충격이 더하다.(아래)이양 시신이 발견된 곳 인근에는 핏자국이 여러 개 남아있다(흰 원 안). | ||
이양은 평소 학교 성적도 좋았고 전교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천안 ○○○’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키 163cm에 예쁘장한 외모를 지닌 이양은 성격도 활달해 남학생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일단 경찰은 이양을 아는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진 못했다. 게다가 범인이 칼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이양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양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는 음식점과 주점이 늘어선 상가들이 있지만 그 일대를 제외하곤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터들이 많다. 경찰은 인근 불량배의 소행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동종전과가 있거나 사건을 전후해 잠적하거나 행적이 수상한 이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간 신빙성이 높다고 여겨졌던 몇 건의 제보는 결국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양 사건의 경우 경찰은 한 가지 단서를 확보하고 있다. 현장에서 찾아낸 머리카락 등에서 채취한 DNA 정보가 바로 그것. 경찰은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DNA 대조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 범인은 O형의 혈액형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천안 시민들의 관심은 이들 두 사건이 동일범에 의해 저질러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학교 1학년, 2학년 학생들이 잇달아 한 달 간격으로 시험이 끝난 다음날 실종되거나 살해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경찰은 ‘범인이 같은 학교 학생을 노렸다’는 얘기에는 큰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양의 경우 귀가 후 교복을 벗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독서실에 갔기 때문에 범인이 이 학교의 교복(붉은 색)을 보고 범행대상을 정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사건 당일 박양과 이양은 우연히도 같은 백화점 근처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엔 이양도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사건이 동일범에 의해 저질러졌을 가능성은 있을까. 일단 경찰은 동일범은 아닐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양의 피 묻은 속옷과 박양의 젖은 속옷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사건의 범죄 수법이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실종된 박양의 행적이 드러날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경찰은 두 사건이 우발적으로 벌어졌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범인이 이양을 살해한 것도 이양이 거세게 반항했기 때문이며, 박양의 속옷을 씻은 후 황급히 버린 것 또한 범행의 우발성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라는 것. 이 경우 범인은 범행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수도 있다. 경찰이 사건이 일어난 일대를 중심으로 목격자가 있는지 계속 수색, 탐문에 매달리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실마리는 시민들의 제보다.”
천안경찰서 형사계 천인선 계장의 고뇌 어린 말이다. 보통 치정,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은 범인이 금방 잡히지만, 이렇게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시민들의 제보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경찰은 이양 사건의 범행시간대로 추정되는 새벽 1시께 ‘이양이 사는 아파트 1××동으로 들어가는 쪽문 앞에서 이양과 실랑이를 벌이던 20대 남자가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하고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목격자 L씨에 따르면 “20대 후반의 남자가 이양의 오른팔을 잡아끌고 있었고 이양은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모습을 가까이서 목격했다”는 것. 경찰은 L씨가 당시 이양이 입고 있던 회색 추리닝을 정확히 진술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 CCTV에 찍힌 이양의 모습이 확실하다고 해 이 남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검은색 잠바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단정한 모습의 20대 남자’의 몽타주를 작성하고 이 남자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할 계획. 과연 ‘천안 괴담’에 마침표가 찍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