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라인 색출’ 칼바람 쌩쌩
해외에서 남한 주재원과 친분을 쌓은 북한 주재원들이 최근 들어 갑자기 ‘안면몰수’를 한다는 전언이다. 이는 지난해부터 북한 중앙당에서 파견된 검열팀 때문 인 것으로 파악된다. 사진은 영화 <베를린>과 처형 직전의 장성택 모습.
현재 남한과 북한의 수교국은 각각 190개국과 160개국이다. 이 중 동시수교국은 157개국에 이른다. 이 때문에 동시수교국 현지에선 남북 주재원들의 동선이 겹치는 경우가 꽤 있다. 일부는 북한 측 주재원들과 자연스레 안면을 트는가 하면, 자리를 함께하고 친분을 쌓는 사례도 있다고 하니, 본국의 상황과는 사뭇 다른 셈이다.
그런데 <일요신문>과 만난 한 해외 주재원은 지난해 현지에서 목격한 북한 주재원들의 이상 조짐을 털어놨다. 이 주재원은 남북 동시수교국인 한 서방국가의 대사관에 몸담고 있는 인물로서 지난 연말 본국으로 복귀했다. 그가 털어 놓은 목격담은 대략 이러했다.
“현지 국가에서 친분을 쌓은 북한 주재원이 있었다. 현지에서 열리는 각종 주재원들의 초청 만찬회와 행사에서 안면을 터놓은 사이인지라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지난여름 이 주재원이 우리와 마주치고도 갑자기 안면몰수를 하더라. 그리고 얼마 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본국으로 송환됐다. 문제는 나 외에도 다른 국가의 주재원들에 의하면 해외 곳곳에서 비슷한 사례가 꽤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주재원은 장성택 라인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또 한 가지 이상 조짐도 포착됐다. 북한 내부와 접촉하고 있는 대북학술기관 NK지식인연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북한의 중앙당에서 특별 검열팀을 꾸려 해외 공관의 주재원들에 대해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특별 검열 이유에 대해 박건하 NK지식인연대 사무국장은 “지난해 전 세계에 파견 나가 있는 북한 주재원들이 실종된 사례가 많았다”며 “북한의 주재원들은 공관 유지를 스스로 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데, 여기에 스스로 외화벌이를 통한 본국 상납이 의무화돼 있다. 외화벌이가 가능한 품목은 슈퍼노트(위조지폐)나 마약류 등이다. 최근 세계 경제 악화와 북한 내 부적격 물품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해외 주재원들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 부담 때문에 많은 실종자가 발생한 듯하다. 특별 검열팀 파견 역시 이 혼란스러운 상황의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주재원의 목격담과 대북학술기관의 정보 등 지난 한 해 패닉 상태에 빠진 북한의 해외 공관 상황을 놓고 볼 때, 결국 그 배경은 ‘장성택’과 ‘상납 시스템’으로 요약된다. 역시 북한 내부와 접촉하고 있는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이윤걸 대표는 금전적 문제보다는 장성택 라인의 숙청 작업에 좀 더 무게를 뒀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현재 해외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북한 주재원의 송환과 실종은 모두 사실이다. 또 지난해 중앙당의 특별 검열팀이 꾸려져 현지서 활동하고 있는 것 역시 맞다. 물론 주재원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매년 3만~5만 달러 수준의 상납금을 위에 바쳐야 한다는 것도 이미 오래 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북한의 군부, 외무성, 무역성 사람들 대부분 이를 감내하고도 많은 혜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외에 나가고 싶어 한다. 검열의 목적은 장성택 라인의 숙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지난 한 해, 장성택 숙청 작업에 따라 수감된 인원이 7000~8000명 수준이라고 한다. 실세로서 해외 라인을 꽉 잡고 있었던 장성택에 줄을 선 대다수의 주재원들이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앞서 우리 주재원이 현지서 북한 주재원과 마주쳤을 때, 그가 ‘안면몰수’를 한 이유는 결국 당시가 특별검열 기간이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윤걸 대표는 “파견된 검열원들은 현지 주재원들 몰래 뒤를 밟는가 하면, 그가 현지서 누구와 접촉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감시하게 된다”며 “형식은 비밀 급파지만, 현지 주재원들도 나름의 정보라인을 통해 자신이 검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마도 이를 안 북측 주재원들은 친분이 있던 남측 주재원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많은 북측 주재원들이 남한과 제3국에 대한 망명이 아닌 잠적을 택한 이유는 북한 현지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선책인 것으로 보인다. 만에 하나 망명의 길을 택한다면, 북한 현지 가족들의 안전은 담보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들 역시 조사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입장에선 해외 공관과 주재원들의 혼란이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특히 오랜 기간 상당한 노하우와 영업라인을 갖고 있는 기존 주재원들이 교체됨에 따라 외교와 무역에 있어서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장성택 라인이 갖고 있는 비자금과 영업라인은 북한에 있어서 큰 축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핫산-나진 개발과 관련해 러시아에 주재해 있던 일부 북한 주재원들이 송환된 뒤 얼마 후 다시금 현지로 복귀하는 사례가 목격되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혼란을 겪은 북한의 외교라인 재구축은 집권 4년차를 맞이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큰 숙제로 떨어진 셈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