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에 당한 수모 정남규에 또 당할라
▲ 지난 2004년 7월 이문동 살인사건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유영철(왼쪽)과 최근 자신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백한 연쇄살인 피의자 정남규의 현장검증 모습.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예상 밖의 소득을 얻은 경찰은 여러 정황상 이문동 살인 사건도 정 씨의 범행이 유력하다는 판단 하에 확실한 증거 확보를 위해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 씨의 예기치 못한 자백으로 고무됐던 분위기는 잠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찰 내부적으로는 곤혹스러운 모습이 보이고 있다.
경찰이 이문동 사건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지난 2004년 경찰이 이문동 사건을 유영철의 범행으로 확신하고 검찰에 송치했으나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정 씨의 자백으로 이문동 사건이 말끔히 해결된 듯 보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정 씨가 검거되기 전까지의 경찰 수사가 무척이나 허술했다는 점을 경찰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더구나 자백 외에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충분치 않은 데다 정 씨가 유 씨처럼 진술을 번복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 정작 정 씨의 자백을 받아 놓고서도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러다보니 경찰 내에서도 정 씨 진술의 신빙성을 놓고 시각이 엇갈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문동 살인 사건은 지난 2004년 2월 6일 저녁에 발생했다. 당시 동대문 의류 상가에서 일하던 전 아무개 씨(여·25)가 이문 1동 골목에서 괴한의 칼에 복부, 가슴 등을 난자당해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 직후 관할인 청량리경찰서(현재는 동대문경찰서에 편입)는 전 씨의 애인, 전 씨가 살해당하기 직전 자신이 일하는 의류매장에서 환불 여부로 심하게 다퉜다는 여성 손님의 애인, 그리고 이문동 주변의 정신이상자 등을 용의선상에 놀려 놓고 수사를 진행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이문동 사건은 경찰 관계자들 사이에서까지 “미제 사건 중 경찰이 가장 헛다리짚은 사건”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수사가 부실했던 사건이었다. 범행 현장 증거나 목격자도 없어 의문만을 가득 남겼다.
경찰이 이문동 사건의 범인으로 유 씨를 지목한 것은 지난 2004년 7월 22일. 부유층 노인과 여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검거돼 조사를 받던 유 씨가 조사 도중 “이문동 사건을 저질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일요신문>이 단독으로 입수한 이문동 사건 수사 기록에는 유 씨가 검거된 후 여덟 번째 경찰 신문을 받는 자리에서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설명하다가 이문동 사건을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경찰은 이문동 사건 현장 검증까지 실시하고 유 씨에게 범행 사실을 거듭 확인 받았다. 수차례 조사 끝에 경찰은 유 씨가 동대문에서 이문동으로 건너와 윤락행위 단속을 명분으로 가짜 경찰 신분증을 제시하고 전 씨에게 돈을 뜯으려다 전 씨가 불응하자 실랑이 끝에 칼로 피해자의 가슴과 복부를 찔러 살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유 씨는 지난 2004년 9월 2차 공판에서 “경찰이 이문동 사건 내용을 미리 보여주며 이를 자백하도록 회유했다”며 범행을 전면 부인했다. 유 씨는 “경찰 간부가 아들을 대학까지 보장할 테니 자백하라고 해 거짓 진술한 것”이라면서 “경찰 수사 기록을 베낀 검찰이나 초동 수사를 제대로 못한 경찰은 욕을 먹어야 한다”는 말까지 재판장 앞에서 서슴없이 털어 놓기도 했다.
당시에도 일부에서는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가 드러난 마당에 굳이 이문동 사건을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번복할 이유가 없다”며 유 씨의 번복 진술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도 했다. 또 “일각에서는 이문동 사건에 대한 유 씨의 진술이 다른 사건에 비해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못하다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유 씨 스스로 직접 자술서를 작성하면서 이문동 사건 피해자의 인상착의와 현장 상황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며 유 씨가 범인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기자와 만난 한 경찰 관계자는 “유 씨 스스로 쓴 자술서가 A4용지로 20쪽이 넘는다”며 “유 씨가 이문동 사건을 자백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이 수시로 범행 사실을 재확인하자 ‘범행을 저지른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되레 형사들을 나무랐다”며 유 씨가 범인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실제 이문동 사건 수사 기록상에는 유 씨가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등의 식으로 진술이 오락가락하거나 구체적인 진술을 회피하는 부분이 자주 발견된다.
특히 피해자의 등을 찔렀는지 아니면 다른 곳을 찔렀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했으며, 사고 현장의 길이나 장애물 등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하는 등 범행 준비에 있어서 본인의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진술로 일관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유 씨는 범행 현장의 골목길이나 자신이 이문동 현장을 지나다가 봤다는 ‘찻집’의 위치도 첫 진술 당시에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등 이문동 사건 현장의 약도를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으며 피해자의 왼쪽 손바닥과 손등에 있는 상처에 대해 설명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현장 검증 때는 “이 사건 만큼은 솔직히 밝히기 싫다”며 진술을 회피하는 대목도 눈에 띈다.
결국 재판에서 이 사건은 유 씨의 범행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유 씨의 자백 경위나 동기가 석연치 않고 당시 객관적인 상황과도 모순된 점이 있다”며 이 부분은 무죄를 인정했다. 당시 경찰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 없는 억지였는지 말해주는 셈이다.
경찰은 정 씨가 이문동 살인사건을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하자 이번만은 분명하다고 한껏 고무된 모습이다. 경찰 관계자는 “정씨 집에 대한 추가 수색 결과,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발견했다”며 “흉기가 이문동 사건 당시 피해자의 자상과 두께, 폭 등이 일치한다”고 밝혔다. 정 씨는 과거 경찰이 이문동 사건을 유 씨의 범행으로 확신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완전 범죄에 성공했다”며 기뻐했었다는 진술도 받아냈다고 한다.
그래도 경찰은 뭔가 개운치 못하다. 정 씨의 범행이 사실로 드러나도 이미 경찰은 이문동 사건의 범인을 유영철로 확신해왔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경찰의 ‘무능한’ 수사 능력을 경찰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정 씨가 유 씨처럼 진술을 번복한다면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정 씨가 경찰이 수사상 시행착오를 겪었던 이 사건을 이용해 그동안 쌓인 수사 기관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며 자기만족의 수위를 높이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할 수도 있다며 경계하는 모습이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