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으라는 범인은 안 잡고… 피해자만 울렸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임 씨는 성폭행 사건을 신고한 A 씨(여·42)를 찾아가서 “수사상 당시의 상황 재연이 필요하니 나를 성폭행한 남성으로 생각하고 똑같이 해보라”며 옷을 벗기고 사실상 성관계 직전까지 간 것으로 밝혀졌다. 임 씨는 “상황 재연을 요구한 것은 맞지만 성추행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찰은 “상황 재연을 요구한 것 자체도 엄연히 불법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상 성추행의 의도가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며 곤혹스런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또 한 번 경찰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취재 과정을 통해 일반적인 수사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 재연 요구가 없지 않으며 그로 인해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4월 초 A 씨가 인천 중부경찰서에 “2005년 4월 등 두 차례에 걸쳐 B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한 것에서 비롯됐다.
고소장에 따르면 A 씨는 전세 보증금 시비로 고소를 당했고 이 문제로 B 씨의 증언이 필요했다. 다급해진 A 씨는 몇 차례에 걸쳐 B 씨에게 증언을 부탁했고 자꾸 차일피일 미루는 B 씨에게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B 씨의 요구로 저녁 식사 후 술자리가 이어졌고 결국 A 씨는 과음으로 정신을 잃은 채 인근 모텔로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고소장의 내용이었다.
B 씨의 증언으로 다행히 A 씨는 전세 보증금 관련 소송에서는 무혐의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계속되는 B 씨의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한차례 더 성폭행을 당하자 A 씨는 B 씨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고소장을 접수한 중부서는 A 씨와 B 씨를 모두 불러들여 조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주장은 전혀 상반됐다. B 씨는 지난해 4월 모텔에서의 성관계는 성폭행이 아닌 쌍방의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주장이 상충되는 데다 어느 한쪽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도 부족해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졌고 A 씨는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에 빠져 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중부서의 담당 형사 임 씨는 지난달 21일 A 씨를 찾아가 “1년이나 지난 사건이기 때문에 당시의 정확한 기억을 되살려야 하고 수사상 필요한 과정이니 성폭행 당한 그때 상황을 재연해보자”고 요구했다.
A 씨 주변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A씨는 수사 관례상 경찰의 상황 재연 요구에 당연히 응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연 과정에서 임 씨는 점점 이해하기 힘든 요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급기야는 속옷 차림이 된 A 씨에게 속옷마저 벗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 A 씨는 수치심 때문에 속옷을 입고 벗기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 씨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시 B 씨가 당신을 성폭행했던 것처럼 그대로 해 보라”며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급기야는 관계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것. 그때서야 단순한 상황 재연이 아니라고 느낀 A 씨는 임 씨를 밀치며 거세게 반항했고 상황은 여기서 끝났다고 한다.
A 씨는 며칠 후 변호사와 여성상담소 등에 자문을 구했고 그 결과 당시 임 씨의 주장과는 달리 자신에게 상황 재연의 의무가 없음을 알고 분노에 떨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당한 상황을 상담소와 지역 언론사 등에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고 그의 사연을 들은 주변 관계자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이 외부에 공개됐다.
결국 임 씨의 소속 경찰서인 중부서도 10일 임 씨를 직위해제하고 인천지방경찰청은 임 씨를 긴급체포, 조사에 착수했다. 수사 과정에서 임 씨는 “재연을 요구한 것은 인정하지만 A 씨가 스스로 옷을 벗었으며 강제적인 폭행을 시도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임 씨가 자신의 직분상 성폭력 사건을 수사할 때의 별도 지침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는 데도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강제할 수 없는 상황 재연을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성추행에 대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재연 사건 당시 피해자 A 씨를 대동하여 현장에 나갈 계획이 있음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고, 2인 1조의 수사 원칙을 어기고 단독으로 행동했으며, 재연 후에도 수사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임 씨가 피해 여성과 성적 접촉을 시도하려는 의도 없이 단순한 수사 의지를 발휘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입증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인천지방경찰청은 임 씨에게 직무를 빙자해 해당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의무를 강요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와 ‘성폭력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 중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를 적용하여 구속 영장을 신청, 현재 그는 검찰에 송치된 상태다.
동료 경찰들은 침통함과 함께 “어제까지 같은 동료였는데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이번 사건을 접한 한 주변 관계자 또한 사견임을 전제로 “임 씨가 성폭행을 무리하게 시도했다기보다는 지방의 남편과 떨어져 사는 A 씨의 특수한 상황 등을 이용, 음흉한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가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관측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 임 씨가 “이런 종류의 사건을 재연하다보면 대역을 맡은 경찰과 피해자 사이에 분위기가 무르익어 실제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는 A 씨의 주장이 전해지며 이 관측에는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여성시민단체의 우려는 심각하다. 가뜩이나 경찰에 신고하기를 꺼려하는 지금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기 때문. 경찰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는 반응이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성폭력 사건의 여성 피해자가 갖는 수치심은 주변의 편견을 통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이다. 자신이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구조에서는 피해자가 수사 협조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성폭력 수사시의 별도 지침이 어떻게 되는지는 수사관들 사이에서만 공유될 사안이 아니다. 성폭력 피해자도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행사하고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숙지할 수 있는 기회가 사전에 주어졌다면 이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씁쓸해 했다.
최윤지 프리랜서 woxl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