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조선은 대명의리를 중시하는 중화주의적 사고가 강했던 데다 후금이 일으킨 두 차례 전쟁의 피해자였던 탓에 청 왕조를 오로지 ‘오랑캐’로 바라보았고, 그러한 시각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르하치는 결코 일개 야만족 정복자로 폄하할 인물은 아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고작 13벌의 갑옷과 약간의 병사를 밑천 삼아 요동 건주 지역에서 기반을 다진 그는, 뛰어난 전략전술로 요충지를 차례차례 발아래 두었다.
또한 만주 칸이 되어 만주문자의 창제를 명하던 누르하치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 그대들은 본국의 언어로 글을 이루는 것은 어렵다 하고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것은 쉽다고 하는가?” 마치 조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던 당시를 연상케 한다.
누르하치가 여진을 하나로 통일하고 공통 언어를 기반으로 문자를 창제하며 사회구성의 기본이 되는 팔기 제도를 설립함으로써, 만주족은 단순한 부족 간의 통일에서 나아가 사회·문화 면에서도 비약적 발전을 맞는다. 그는 노련한 지략가이자 외교가였으며 만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문화적 리더이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그가 변방의 여진족 소년으로 태어나 명 조정의 신임을 받는 지도자로 지위를 굳히고 마침내 그 명나라를 무너뜨린 요동의 지배자가 되기까지, 그의 극적인 생애 속의 흥미로운 일화들과 널리 알려지지 않은 탁월한 면모는 물론이고 인격적 결함까지 입체적인 면모를 가감 없이 되살려냈다.
특히 한국 독자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은 풍부한 조선 사료의 인용이다. 역사적인 사르후 대전투에 파병되어 참전했던 조선 양반 이민환의 기록인 <책중일록>이 대표적이다. 평범한 조선인이 요동에 직접 들어가 누르하치의 군대와 직접 마주하고 포로가 되어 후금에 들어가 살았던 체험을 통해 독자는 누르하치의 군대에 대해 더욱 다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르후 파병에 관한 조선의 공식적 기록 <광해군일기> 같은 자료를 통해서는 조선이 국가적 입장에서 당시 막 태동하여 자립하기 시작한 청나라와 당시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했는지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천제셴 지음. 홍순도 옮김. 돌베개. 정가 1만 8000원.
연규범 기자 ygb@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