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만 원 빚이 한 달 안 돼 1000만 원으로…‘네이버 주소록’ 담보 잡아 채무자 지인 압박까지
#사망 전 제보했는데…경찰 ‘늑장 대응’ 논란
6세 딸을 혼자 키우던 30대 여성 A 씨는 지난 9월 22일 전북 완주에 있는 한 펜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A 씨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유서에는 딸에게 “다음 생에서도 사랑한다”면서 남은 가족에게 “철없는 선택을 해서 죄송하다”고 쓰여 있었다. A 씨의 유서가 적힌 노트에는 ‘조대리 90만 원’ ‘고부장 40만 원’ 등 사채업자 이름과 빌린 금액이 함께 기재됐다.
YTN에 따르면 A 씨는 한 사채업자에게 수십만 원 정도를 빌렸는데 연이율이 수천%에 달해 한 달도 안 돼 1000만 원이 넘게 빚이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처음에 A 씨는 소액을 빌렸기 때문에 갚으면 그만인 줄 알았지만 돈을 갚기로 한 시간보다 1분이 늦을 때마다 10만 원씩 연체료를 내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지인들에게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이자를 감당해내지 못하자 다른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 돌려막기 하는 방법을 택했다.
사채업자들은 A 씨의 지인들까지 연락해 압박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A 씨에게 돈을 빌려줬던 한 사채업자는 A 씨의 지인 B 씨에게 “A 씨가 상환 연락을 받지 않고 있다. 연락을 하라고 전하라”고 압박했다. B 씨가 거절하자 사채업자는 B 씨의 신상까지 거론하며 “그냥 전달하라고 XXX아” “에이즈 걸린 XXX야”라고 욕설하며 B 씨를 위협했다.
사채업자들의 불법 채권추심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A 씨의 지인들에게 “도박 빚을 졌다” “남자에 미쳐 사채를 썼다” “A 씨가 미아리에서 몸을 판다” 등 허위정보가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심지어 A 씨의 딸이 다니는 유치원 교사에게도 이 같은 문자를 보냈으며 “(유치원에) 아이를 보러 가겠다”는 협박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가 사망하자 사채업자들은 유가족에게 “잘 죽었다. 가족들도 (A 씨) 곁으로 보내 주겠다”는 말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YTN에 따르면 A 씨의 지인은 9월 9일 사채업자에게 받은 A 씨에 대한 비방 내용의 문자를 경찰 정보관에게 제보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A 씨가 사망하기 보름여 전이다. 이런 상황은 A 씨가 숨진 22일 이후 서울경찰청에 보고됐는데 그동안 A 씨를 보호하기 위한 경찰의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정식 신고가 접수되지 않았고, A 씨와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이 최초로 피해 상황이 알려진 뒤 약 46일 만에 정식 수사에 착수해 ‘늑장 대응’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게다가 A 씨가 사망한 9월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의 불법사금융 특별단속 지침에 따라 불법 채권추심 행위가 채무자에 대한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수반할 경우 ‘패스트트랙’으로 우선 수사하도록 정해진 기간이었다.
수사 착수 지연과 관련해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은 11월 18일 기자간담회에서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수사 부서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됐던 것으로 파악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A 씨가 9월 22일 사망하기 전 정보관이 A 씨의 지인으로부터 전화 제보를 받았지만 해당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내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소요됐다”면서 “(수사 지연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 “대포통장 재범 어려워…초범 처벌 강화해야”
이 사건을 접한 윤 대통령은 11월 12일 “분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불법 채권추심 행위는 서민의 삶을 무너뜨리는 악질적인 범죄”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과 경찰은 수사 역량을 총동원해 불법 채권추심을 뿌리 뽑고, 금융당국은 서민금융지원 정책을 전면 재점검해 서민들이 불법 사채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경찰은 ‘불법 사금융 특별단속팀’을 꾸리겠다고 나섰으며, 검찰 역시 대검찰청 형사부를 중심으로 불법 사금융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경의 적극적인 수사 착수에도 불구하고 불법 대부업 광고가 여전히 판치는 등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센터 소장은 “최근 일 주일만 봐도 불법 채권추심 피해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가 줄지 않았다”면서 “경찰이 수사를 시작한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범죄자들은 증거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수사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부분 피해자들이 신고나 제보를 꺼려한다는 점이 불법 채권추심 피해를 확산시키는 요인이다. 이는 불법 사채 담보물 트렌드와도 관련 있다. 최근 담보물로 많이 잡히는 것은 네이버 주소록이다. 네이버 주소록은 핸드폰을 분실했을 때를 대비해 온라인으로 휴대전화 주소록을 백업하는 기능이다. 이에 대해 잘 모르는 피해자들은 불법 사채업자들이 시키는 대로 네이버 주소록을 제공하는데 이때 휴대전화에 저장된 모든 연락처가 넘어간다. 연체 시 채무자들은 지인들에게 피해가 확산될까봐 수사기관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불법 대부업체는 소셜미디어(SNS)에 채무자의 얼굴을 공개하며 채무 변제를 압박하기도 한다. 한 인스타그램 계정은 영상을 통해 남녀 여러 명의 얼굴을 공개하면서 “지인들 팔아서 돈 빌리는 파렴치한” 등으로 소개한다. 해당 영상에는 채무자들이 가족과 지인의 이름을 호명하며 “갚을 여력이 없으니 대신 변제해달라”고 부탁하거나 주민등록증, 가족관계증명서를 보여주면서 채무 관계를 처음 맺을 당시 모습이 나온다. 싱글맘 A 씨를 압박했던 대부업체도 A 씨가 차용증을 들고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바 있다.
불법 대부업체가 주로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사용한다는 점도 수사를 어렵게 만든다. 한국금융범죄예방센터는 누리집과 유튜브 등을 통해 불법 대부업체나 보이스피싱 조직 등이 사용하는 계좌를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비웃듯 피해자들을 압박해 끊임없이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개설해 사용하고 있다. 경찰이 직접 이들에게 전화를 해도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가 아니기 때문에 욕설을 하면서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기동 소장은 대포통장 개설 행위를 초범부터 확실하게 처벌해야 불법 사금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불법 대부업자들은 원금이나 이자를 깎아 줄 테니 명의를 빌려달라고 채무자들을 회유하며 대포통장과 대포폰을 만든다. 채무자들은 대부분 초범이며 단순 가담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법정에서 벌금 300만 원 정도를 받는 데 그친다. 하지만 이들은 은행 등 기관에서 계좌를 개설해주지 않기 때문에 재범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대포통장 초범 처벌을 강화할 경우 금융범죄 90%는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포통장 개설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대법원은 관련 형량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9월 30일 134차 회의를 열고 대포통장 개설 등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범죄에 최대 징역 5년을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강화하는 수정안을 심의했다. 보이스피싱 등 조직 범죄에 가담하기 위해 대포통장 등을 만들었을 경우 받을 수 있는 기존 최고 형량은 징역 3년이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